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자로서 지난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영국 역대 보수정권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온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6일(현지시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 경제정책에 가장 큰 영향
17일 <로이터통신>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프리드먼 가족의 대변인은 이날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그의 사망에 대해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프리드먼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제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경제학자였다”며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경제학으로 ‘프리드머니즘’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내는 등 우파 정치인들의 경제정책을 사실상 만들어주는 설계자의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그는 정부 규제를 철저히 배격한 시장주의자로서 이를 경제외의 영역에도 확장시켜 많은 논란을 낳았다”며 “그는 군 복무를 위한 징집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특히 시장경제에 맡겨야 한다며 매춘과 마약사용 등을 범죄행위에서 삭제해 자유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뒤 수많은 칠레국민들을 학살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의 경제자문을 맡아 비판을 받았다”고 그의 사상과 생애를 비판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밀턴 프리드먼: 실패 속의 연구’라는 기사를 통해 “프리드먼은 우파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대표적인 경제학자였다”며 “그러나 그는 전후 세계경제학을 주도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인 폴 사무엘슨만큼 중요한 경제학자는 아니었으며 특히 많은 논란을 빚어온 경제학자”라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그는 특히 자유주의 시장경제정책을 주도했지만 실제 공공정책을 담당하면서 대부분 실패로 끝나 이론과 현실의 괴리됐다는 비판을 받았다”며 “그는 경제이론에서는 탁월했으며 특히 통화의 역할에 대한 분석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실제 그의 정책에 대한 분석결과는 그렇게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자로서 지난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 위키피디아
20세기 경제학계가 배출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평가되는 프리드먼은 철저하게 정부 개입을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신봉한 탓에 '자유경쟁 체제의 굳건한 옹호자', '통화주의의 대부', '작은 정부론의 기수', '반 케인스학파의 창시자' 등으로 불렸으며, 시카고 대학 재직 동안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시카고 학파의 대부로 군림하며 쟁쟁한 경제학자들을 길러낸 자유주의 경제학파의 대부다.
그는 1930년대 뉴딜 정책 이후 미국 경제 정책을 지배해 온 전통적 케인스 경제학에 반하는 통화주의(Monetarism)를 제창해 세계 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같은 그의 경제 사상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지도자들의 신보수주의 경제정책을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리드먼은 정부 규제에 맞서 기업의 자유를 설파했으며 통화 공급을 통한 점진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통화정책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그는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자', '자유경쟁체제의 굳건한 옹호자', '통화주의의 대부', '작은 정부론의 기수', '반(反) 케인스 학파의 창시자' 등으로 불려왔다.
화폐 가치 안정을 경제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통화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그의 이론은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했으나, 지나친 시장경제에 대한 신봉으로 실제 경제현장에서 시장의 실패현상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반(反) 프리드먼을 지향하는 경제학자들의 목소리도 높다.
특히 프리드먼의 경제사상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가 세계화와 함께 세계경제의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를 불러옴에 따라 그의 학설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의 빈곤한 유대인계 러시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장학생으로 인근 뉴저지의 럿거스 대학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 학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 시절 연방정부 경제조사국에서 근무하는 등 1935년부터 10년간 미국 재무부, 국립자원위원회 등에서 근무했고 1946년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약 3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당초 경제학을 공부할 당시에는 철저한 케인즈주의자였으나 실제 경제 현상이 케인즈 이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반케인즈학파의 선두에 나섰고, 지난 46년 콜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받은 이래 76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시카고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특히 프리드먼이 1977년 당시 신진 경제학자로 부상하던 로버트 루카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시카고 대학을 떠났고, 이후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연구에 몰두한 뒤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