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과거사 사과에는 '좌우'가 없다
<특별기고> 메르켈, 2차전 발발 70주년에 무릎 꿇어 사죄
독일의 과거사 사과에는 좌우가 없다
1939년 9월1일 나치전함 슐레스비그-홀슈타인호는 새벽 4시45분 함포사격으로 세계대전의 전단을 열어 3천500명의 나치독일군을 침공시켰다. 180명의 폴란드 수비대가 1주일간 혈전을 펼쳤으나 몰살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대전이 벌어졌다. 20개 정상들이 촛불을 들고 70주년을 기념한 자리에서 메르켈은 1966년 5월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 후 2번째로 유럽과 세계에 용서를 구한 것이다.
유럽의 20세기는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2차 대전에 대한 책임을 전후 독일 민주주의세력이 스스로 지면서 사죄함으로써 깨끗한 전후처리가 가능했다. 좌파지도자 브란트는 반나치 레지스탕스였고, 우파지도자 메르켈은 동독출신 민주항쟁주역이지만, 나치독일의 만행사죄에는 좌우가 없었다.
그래서 메르켈은 “테러와 폭력의 대륙에서 자유와 평화의 기적을 낳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독일이 시작한 전쟁은 권리박탈, 파괴, 모욕의 수년간 수많은 시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했다. 나는 희생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한다. ...유럽은 자유와 평화의 대륙이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이는 바로 기적 그 자체이다!”
메르켈의 기념사는 감동 그 자체였고, 독일-폴란드의 과거청산과 역사적 화해는 그래서 이루어졌고, 오늘에는 같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러시아는 과거사 은폐했다가 폴란드에게 혼쭐
70주년 기념식에는 주최국 카친스키 폴란드대통령과 더스크총리, 러시아 푸틴총리, 피용 프랑스총리와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총리, 라인펠트 스웨덴총리, 바로소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오바마 미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브라운 영국총리가 불참했다. 미국 대통령 안보특보, 영국외상이 대신 참석했다. 70주년 기념의 뜻은 나치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가해자와 미국,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등 연합국들과 피해국들이 두루 참석해 모두가 유럽가족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폴란드 간에는 과거사에 관한 해석의 차이로 갈등이 표출되었다. 전쟁발발 원인을 두고 논쟁으로 비화됨으로써 공산주의시대 은폐되었던 진실게임으로 기념식장은 떠들썩했다.
푸틴총리가 1934년 폴란드가 나치독일과 불가침협정을 맺고 1938년에는 히틀러의 체코 분할에 기여하면서 소련을 적대국으로 고립시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푸틴의 발언은 폴란드의 미숙한 외교로 히틀러의 전쟁야욕을 오판했다는 비판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푸틴은 그후 독소불가침조약이 히틀러의 전쟁개시에 힘을 실은 명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1939년8월23일 나치독일의 리벤트로프와 소련 모로토프 외상이 채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세계대전의 개시를 가능케 했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고 그는 밝히고 “스탈린은 당시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지만 비판되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치독일의 폴란드침공 후 17일 만에 스탈린이 붉은 군대를 폴란드침공에 투입, 동부를 점령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폴란드의 카친스키대통령은 푸틴에 대해 격렬히 반격했다. 그는 1938년 나치의 체코 분할에 대한 폴란드의 역할에 관해 “중대한 과오이며 죄악이다”고 반성한 후,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 등 2만2천여 명을 카틴에서 학살한 사실을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비교할 수 없단 말인가? 두 범죄 간에는 상항이 다름에도 일종의 관련성이 있다. 유태인은 유태인이기 때문에 죽었고, 폴란드장교들은 폴란드인이기 때문에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카친스키대통령은 독소불가침조약 채결 3주 후, 나치침공 17일 후인 1939년9월17일 소련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해 한 것은 “폴란드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카틴학살은 구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소련이 “나치독일군의 소행”으로 선전했으나 소련제국 멸망후 보리스 엘친이 ‘학살주범은 소련군’이라고 자백하고 사과했다. 카친스키는 재빨리 논전을 끝내고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해방해 준 사실을 인정하며 러시아-폴란드 관계를 전략적 파트너로 격상하는 데 합의, 푸틴과 화해무드를 회복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독일의 과거 청산
과거사문제는 풀지 못하면 국가간 갈등과 불화의 중요원인이지만, 독일의 반성과 사죄는 갈등을 극복해 화해협력과 동반자를 유도하는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이 6천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2차 대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의 기적’을 낳은 데는 독일의 책임의식과 반성이 과거청산으로 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브란트의 사죄나 메르켈의 이번 사과가 세계적 감동을 일으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년 전 베를린장벽 붕괴 후, 분단독일이 2차대전적대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2차대전 전승국들과 폴란드등 피해국들의 동의를 받아 통일한 배경에는 전후 독일의 과거청산이 크게 작용했다. 나치전체주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현대민주주의를 건설한 새독일은 자유, 인권, 평화, 평등의 기적을 낳은 모범국으로 거듭났다.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즘을 폐기하고 나치전범을 준엄하게 심판함으로써 과거청산에 성공함으로써 정치지도층이 피해국에 사죄하는 도덕성을 갖추게 되었다.
독일의 나치전범 청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8월11일 뮨헨재판소는 나치장교 조세프 쉔그라버에게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는 1944년 나치장교로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시민 14명을 학살한 혐의로 2006년 9월28일 이탈리아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탈리아는 범인인도요청을 했으나 독일은 거부하고 스스로 재판한 것이다. 독일검찰은 91세의 나치전범을 체포해 최고형을 선고했다. 독일의 나치전범청산은 이렇듯 준엄하고 철저하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나치전범이 일생을 조용히 마칠 수 없으며, 반드시 응징당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범이 합사된 신사에 정치지도층이 참배하면서 피해국들에게 참배는 꿈도 꿀 수 없다.
앞서 7월에는 폴란드의 소비보르 강제수용소에서 2만9천여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미국에서 5월에 인도된 나치전범 뎀잔주크를 뮨헨재판소가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독일의 과거청산은 독일을 모범국가로 존경받게 만들어 프랑스와 유럽통합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토야먀, 메르켈에게서 과거사 해결 배워야
2차 대전시 나치와 추축국으로 전범국인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과거청산을 하지 않았다. 과거청산의 거부뿐만 아니라 전쟁범죄를 미화하려고 애쓰며, 왜곡교과서까지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특히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구니 신사를 총리와 각료, 국회의원들이 참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등 전쟁피해국들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오늘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다.
54년만의 정권교체로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가 변화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신사참배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과거사를 직시"할 것을 천명했다. 동북아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지속 등 공산주의시대 종식이 지연되는 것은 독일과 다른 일본의 과거청산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메르켈과 브란트의 폴란드에서 사죄는 마치 일본총리가 한국독립기념관에서 사과하는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2차대전 전후청산이 유럽통합과 냉전종식, 공산주의시대종결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하토야마정부는 직시하고 독일의 과거청산방식을 본받는다면, 동북아의 불협화음, 갈등 등은 정리되지 않겠는가. 메르켈의 말대로 동북아에도 “자유와 평화의 기적”을 볼 날이 있지 않겠는가.
필자 소개
언론인. 1937년 생. 파리 13대 정치학 박사, 파리 1대 프랑스혁명연구소 연구원,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국제문제 대기자. 저서 <프랑스혁명과 한말 변혁운동><지도자와 역사인식><프랑스의 대숙청><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사회민주주의 길-서구 좌우파의 실용주의>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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