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蘿葍]·순무[蔓菁] 재배법(16세기)
04-13. : 무[蘿葍]·순무[蔓菁] 재배법(16세기)
[옛 기술 및 지혜]
1610년대의 농서인 「한정록(閑情錄)」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서 비롯된 굶주림을 기(饑)라 하고 채소가 성숙치 않아서 비롯된 굶주림을 근(饉)이라 한다.”1)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기근”이라 할 때는 곡식과 채소가 모두 성숙치 못하여 먹을거리를 얻을 수 없는 지경을 뜻하므로 곡식 못지않게 채소의 비중을 필수 먹을거리로 인정하였고 작물과 동등시하였음을 알 수 있어 선인들의 탁견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1474~1483년에 편찬된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는 무(蘿䈏)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2) 즉, “소서(7월 7일 경)에 비옥하고 부드러운 모래땅을 골라 무를 파종한다. 두세 번 땅을 갈아엎고 드물게 씨를 뿌린다. 배게 파종하면 뿌리가 작다. 김매기를 여러 번 하는 것이 좋고 목화밭에 흩뿌리는 것도 좋다. 또 입추(8월 7일 경)에 메밀과 무를 파종하면 두 작물 모두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610~1618년에 저술된 「한정록(閑情錄)」에 나오는 설명으로는3) “다달이 파종하고 다달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이며, 거름지고 가벼운 땅에 재배함이 가장 좋으며 물을 자주 준다. 드물게 파종함이 좋으며 조밀하게 심으면 쑥과 같이 잘 자라지 않는다. 채소 중에는 오직 이것이 가장 좋다고 하여 삼복(三伏) 중에 땅을 고른 다음 이랑을 지어 점뿌림한다. 땅이 거름지면 늦뿌림(晩種)하고 자주 물을 준다.”고 하였다.
또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나주산 무가 맛이 좋고 배와 같이 수분이 많다”4)고 기록되어 있다.
순무(蔓菁)는 구황작물을 겸한 채소로서 세종 18년(1436)에는 어명으로 수령들에게 순무 재배를 적극 권장토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즉 왕명으로 채소 재배를 권장한 첫 사례이며 유일한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 기록된 바,5) “2월 경칩(3월 5일 경) 무렵, 봄보리와 순무를 섞어뿌림한다. ... 처서에 순무를 파종하는데 이 때부터 백로 때까지 할 수 있으나 일찍 심으면 뿌리가 굵고 좀 늦게 파종하면 뿌리는 가늘고 잎만 무성하게 된다.”고 하였다.
[토의 및 평가]
무(蘿葍)는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 된 채소로서 5~6세기의 중국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숭(菘) 또는 로복(蘆菔)으로 기재되어 있다. 숭(菘)은 우리나라에서 배추로 불리는데 그 실체는 같은 십자화과 식물인 순무(蔓菁)에서 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다소의 혼선이 빚어진다.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부터 「한정록(閑情錄)」까지의 백수십년 사이에 기술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조파 또는 산파하던 것이 점파법으로 바뀌고 물의 필요성이 강조되기에 이르렀으며 파종이나 수확의 적기폭을 넓게 보았던 생태적 시각이 형성된 데 있었다. 다만 시대 흐름에도 불구하고 배게 심지 말고 드물게 심을 것을 강조하고 있으나 무의 뿌리 비대(根肥大)는 재식밀도보다도 1주1본으로 속아지는 솎으기(間引)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또 다른 근 비대의 필수요소인 잡초와의 공간경합 회피의 필요성이 오히려 사라진 점이 이해되기 어렵다.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나주산의 무 품질이 뛰어났다고 기술된 점은 당시의 특산지 조성 실태를 짐작케 하지만 보다 폭넓은 조사의 결과로 기술된 것이기를 바라게 된다.
순무(蔓菁)는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나 「농상집요(農桑輯要)」에 같은 명칭으로 풀이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상국집(李相國集)에 처음으로 기재되어 있는 바,6)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살아생전인 12세기 이전부터 재배되어 왔음이 증명된다고 하겠다. 특기할 것은 구황작물로 인정되어서 왕명으로 재배가 권장되었던 사례가 있을 정도로 쉽게·빨리 자라며, 생식하기에 거부감이 없고, 공복을 채우는 데 이상적인 품질이었던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배를 처서(處暑)에 시작하는 경우는 무와 함께 순무가 월동식품인 김장용의 채소로 이미 재배가 정착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기술의 요점은 알맞은 사양토의 선택, 여러 차례에 걸친 경운, 알맞은 재식밀도 등이었으며, 그 이외의 연중 재배는 주로 이파리용 채소로 심겨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결론 및 시사점]
당시의 재배기술 및 과학성이나 생산성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다.
[인용 및 설명문]
1) 許筠(1610-1618) 「閑情錄」: “穀不熟曰饑 菜不熟曰饉”
2) 姜希孟(1474-1483)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小暑種蘿葍於肥良沙軟地耕治二三遍疎下其種稠則根小多鋤爲良散下綿田亦佳” “立春耕蕎麥雜蘿葍耕之兩得”
3) 許筠(1610-1618) 앞의 책: “月月可種月月可食地宜肥土宜鬆澆宜頻種宜稀密則芟之蔬菜惟此最良”
4) 許筠(1611) 「屠門大嚼」: “蘿葍 産于羅州者極好 味如梨而多津”
5) 姜希孟(1474-1483) 앞의 책, 二月條: “耕春牟交菁種”, 七月條: “處暑, 翻耕種蔓菁自此時至白露皆可耕早則根大葉小晩則葉潤根細”
6) 李奎報(1168-1241) 「李相國集」: 정식 명칭은 「東國李相國集」으로서 李奎報가 지은 詩文集임. 1241년에 아들인 함(涵)이 편집, 간행하였고 1251년에 왕명으로 再刊行됨.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