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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재배법[區種法]

김샘
조회: 854

04-03. : 구덩이 재배법[區種法]

[옛 기술 및 지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쓰여진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화북농서 「범승지서(氾勝之書)」2)에는 이런 대안으로서의 “구전법(區田法)”에 관한 기록이 있다.
첫째, “주(周)나라 탕왕(湯王) 시절에 극심하고 오랜 가뭄의 재난이 있었다.3)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이윤(伊尹)은 구덩이 가꾸기[區田]의 농사 요령을 체계화하여 발달시키고 얕게 판 구덩이에 거름 주어 씨 뿌리고 물 주어 작물을 가꾸는 요령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알려 주었다.”4)
둘째, “구덩이 가꾸기란 주로 거름기[糞氣]5)에 의존하는 탁월한 재배법이므로 (원칙적으로) 거름기가 많은 비옥한 땅[良田]에서는 구태여 따를 필요가 없다. 대체로 산지(山地)나 언덕[陵], 마을 가까운 절토지나 또는 성벽 안팎의 경사면 땅 따위의 입지에서 구덩이를 얕게 파고 작물을 가꾸는 방식이 한결같이 응용될 수 있다.”6)
셋째, “구덩이 가꾸기 농사에서는 땅의 힘[地力]을 (제한된) 구덩이로 몰아 세워 주어야 하므로 구덩이 주변의 땅까지 갈이[耕作]7)할 필요가 없다. 무릇 구덩이 가꾸기를 할 경우에는 버려진 땅에 직접 구덩이를 파고 거름 주어 씨 뿌리는 일로 비롯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어떤 별도의 준비작업을 미리 해 둘 일이란 필요하지 않다.”8)
넷째, “우선 일묘(一畝)의 땅을 기준으로 한다. ... 구획[田丁]을 나누어 경계[두둑]짓고 ... 통로[道]를 내어 사람이 오갈 수 있게 한다. ... 구획을 가로 질러서 고랑[溝]을 파 준다. 고랑은 폭과 길이를 각 한 자로 하고 이 때 파낸 흙은 고랑 사이에 쌓아서 고랑 사이도 또한 한 자쯤 떨어지게 한다. (만일 고랑 사이의 간격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파낸 흙 부스러기를 쌓지 못하게 될 경우라면 폭9)을 두 자로 넓혀서 쌓아 주기라도 해야 한다.)”10)
다섯째, “구덩이[區] 안에 풀이 돋아나면 뿌리까지 송두리째 뽑아 매어 준다.11) 반면에 씨 뿌린 구덩이 사이에 바깥쪽에서 돋아나는 풀은 삽을 대어서 깨끗하게 땅을 밀어 깎아 주고, 풀이 어릴 경우라면 호미로 매어 주는 것이 좋다. 작물의 모가 너무 크게 자라나서 풀매기가 어렵게 되면 뾰족하고 예리한 낫[鎌]을 지면 가깝게 대어서 풀을 베어내는 것이 좋다.”12)고 하였다.

[토의 및 평가]

「범승지서(氾勝之書)」는 이에 더하여 “이들 구덩이는 농한기에 등고선을 따라 빙빙 돌아서 파내려 가는데 정월에 봄보리를 파종하고 2~3월에 마[山藥]와 토란[芋子]을 심으며 3~4월에 조[粟]와 콩·팥을 파종하고 8월에는 보리·밀·완두를 파종한다”는 구체적인 재배시기를 기술하였다.13)14) 또한 절차에 따라 심되 많이 짓기를 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가르쳐졌다.15)
당시의 설정은 춘추전국시대, 특히 전국시대는 중국의 역사상 매우 급변하고 진보 또한 비교적 빨랐던 시대로써 농업적으로는 쇠쟁기와 가축을 쓰기 시작했고 비료를 중시하여 대규모 관개시설을 세우기도 하였다. 농업을 가르치던 농관(農官)의 한 사람이었던 범승지가 현실적으로 농토가 없거나 적었던 농민의 입장, 또는 버려진 땅이나 귀퉁이 산언덕 자락의 땅에 대한 쓸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이미 이전시대에 창안되었던 주(周)나라 이윤의 “구덩이 가꾸기”를 현실적인 기술로 재정리·파급시킬 도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구종법 또는 구전법은 이후의 세대를 거치면서 많은 경험과 재배실제를 겪으면서 기술의 보완과 개선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가 원나라 왕정의 「농서」나 청나라 고종(高宗)의 「흠정수시통고(欽定授時通考)」 또는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를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즉 “구종(區種)은 본래 가뭄을 막고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니 토지가 높은 산읍지역에 해마다 이처럼 심어 가꾼다면 항상 풍년이 들 것이로되 오직 집 가까이 물가가 있는 땅이라야 좋다”거나 “구전에 작물을 심을 때는 소에게 메우는 쟁기가 필요 없고 단지 가래[鍬]나 괭이[钁]로 따비하여 개간하며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집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거나 또는 “비록 재해를 만나도 감소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즉 ... 온 집안의 일년 살림이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므로 실로 가난을 구제하는 지름길이요, 흉년을 대비하는 요체”라고 하였다.16) 또한 가사협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을 인용하여서 “구전은 옆의 땅까지 (구태여) 갈지 않아도 거의 땅힘[地力]을 총동원시킬 수 있다”고도 하였다.17)
중국의 황토와 같이 질소·인산과 유기질이 부족하고 땅의 노화·쇠퇴·침식이 심하여 산림이 황폐할 뿐만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물 이외에는 북서풍이 심한 겨울의 눈[降雪]까지도 받아야 하는 입지에서라면 구덩이 가꾸기야말로 더없이 현실적으로 지혜로운 식량보전적 농법이었다고 하겠다.
범승지의 구전법은 전한말(前漢末) 성제(成帝 : 32~7 BC) 때에 관중(關中) 지방에서 제창되어 처음 시행되었다고 하며, 조과(趙過)의 대전법(代田法)과 함께 한(漢)의 국력[農業生産力]을 지탱시켰던 농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구전법은 영세한 농사를 앞세워 작고 협소한 자투리땅이나 놀리고 있는 귀퉁이 및 다락땅, 언덕비탈땅 등지에서 최고도로 생산의 증강을 꾀하였던 특수 개량농법이라 할 수 있다.
구종, 즉 구전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고랑[溝]을 타고 씨를 뿌리는 구종법(區種法), 즉 “고랑 가꾸기”와 다른 하나는 구덩이[坎]를 얕게 파고 씨를 뿌리는 감종법(坎種法), 즉 “구덩이 가꾸기”였다. 앞의 파종하는 곳은 고랑으로써 조과의 대전법과 매우 유사하며 범승지의 독창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반면에 뒤의 파종하는 곳은 구(區) 또는 감(坎), 즉 구덩이라 불리는 곳으로써 재배 요령 자체가 묘(畝) 단위의 작은 규모이며 산언덕이나 도시 주변의 경사지, 자투리 다락밭에 응용되는 초집약적 소농방식이었다. 특히 “구덩이 가꾸기”에서는 쟁기 대신에 재래농구인 따비·굴봉·낫 따위의 간단하고 유치한 손도구만으로도 쉽게 농작업이 이루어지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남는 시간에 틈이 있을 때마다 파엎기[耕反]를 하다가 오종필잡(五種必雜 : 곡류섞어뿌리기)하는 방식으로 파종기가 다른 각종 작물을 때맞추어 심게 함으로써 토지가 없는 빈농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해충이나 병, 또는 가뭄의 재난을 피하여 대비토록 한 일종의 비황잡법(備荒雜法)으로 창안·활용되었던 것이다.18) 역사적으로도 범승지의 구전법 가운데에서 고랑 가꾸기는 대전법(代田法)과 견종법(甽種法)에 흡수되어 존속되다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구덩이 가꾸기만 일반화하여 발전·존속케 되었다고 한다.19)

[결론 및 시사점]

한 나라나 지역의 환란(患亂)은 예기치 않았던 천재지변뿐만 아니라 다분히 인재의 하나로 일어날 수가 있어서 결코 어느 곳 어느 때에도 그 위험을 벗어나 있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고려말 공양왕조와 임진란이 있었던 선조조에는 국토의 황폐화로 인한 농지의 치명적인 결손이 있었다. 조선조 태종 때에 120만결, 세종 때에 170만결이던 농지가 환란시에는 각각 60~80만결과 50만결로 줄어든 사례가 있다.1) 매번 새로운 개간이나 농지회복의 절차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피나는 노력과정의 사례를 역설하는 역사였다고 하겠다.
이상의 내용, 즉 고대 중국의 섬서 및 화북 지역에서 수천 년에 걸쳐 전래되어 온 “구덩이 가꾸기” 농사법의 내력과 실제를 살펴보면, 언제 어디에서도 그 원리와 지혜만은, 비록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 살려 응용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농사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연의 변화는 언제 어디서라도 순환되고 번복되기 마련인 탓이다. 현재와 미래에도 먹을거리는 막대한 크기로 생산·공급되어야 하고, 먹을거리 생산은 결코 “자연친화적 입지”를 벗어나서 영속되지 못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아쉬워질 언젠가 우리들의 입장이나 운명”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하여 이보다 좋은 지혜의 사례가 있기 힘들다고 하겠다. 오늘날, 현대의 농사기술은 막대한 기계력과 에너지, 농약과 비료, 또는 과소비 시장 경제구조에 의하여 영위되고 있어서 이구동성으로 외쳐지는 말인즉, “이대로는 안 되겠다”, “농사가 자연을 망가뜨리는 행위”라거나 또는 “농사행위는 지속적·생태적·자연친화적이어야 하고, 과소비를 줄이는 생존산업으로 재구성해야 하겠다”는 데에 이르고 있다. 농산정책 초미의 관심과 여력의 몰두가 “환경친화적 농법개발 및 파급”에 주어지고 있으며, 21세기 초두부터 세계적인 곡물가격 급등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부족 실태와 기상이변에 따른 농경지 황폐화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보다 과학기술과 수단이 발전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 맞도록, 고대 화북과 섬서의 “구덩이 가꾸기” 농법과 지혜를 응용하고 재구성 발전시켜 우리 미래의 초집약적 농지화 · 생산화농법으로, 또한 특수한 비황잡법의 농사기술로 연구발전하고 현실화 가능성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도시주변의 자투리땅에서 호박 구덩이가 자주 눈에 띄고, 이런 곳에서 별다른 재해가 없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용 및 설명문]

1) 정우영 등(1999) 「국사(상)」, 조선시대 토지의 증감, 두산동아
2) 구자옥·김장규·홍기용 역주(2007) 「범승지서(氾勝之書)」, 한국농업사학회
3) 湯王은 주나라[周王朝]를 세운 인물로서 유능한 宰相인 伊尹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늦어도 기원전 16세기 초까지는 재위하였던 것으로 알려짐. 이윤의 구종법 효과에 대한 뒷날의 기록인 「御覽」 8권에 의하면 “勝之試爲之 收至畝四十石”, 즉 범승지가 실제로 시험을 해보니 소출이 畝当 40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4) 湯有旱災 伊尹作爲區田 敎民糞種 負水澆稼
5) 거름기[糞氣]란 척박한 토양에 제한된 얕은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속을 채우는 인위적 거름에 의하여 조성되는 토양의 肥沃度를 뜻함.
6) 區田, 以糞氣爲美, 非必須良田也. 諸山, 陵, 近邑高危, 傾坂, 及丘, 城上, 皆可爲區田.
7) 경(耕) 또는 경작(耕作)은 땅을 때맞추어 갈아엎고 써리며 거름내고 물주는 일련의 농사일을 뜻함
8) 區田, 不耕旁地, 庶盡地力. 凡區種, 不先治地, 便荒地爲之.
9) 고랑[溝]은 구덩이 가꾸기에서 필요한 것으로써 구덩이 가꾸기 자체가 좋은 땅보다는 못쓰는 땅, 염해지 또는 배수가 불량한 땅 등지를 이용하는 농법이므로 고랑을 내고 그 때 나온 흙으로 성토하여 정방형 또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며, 이를 거름 주고 물 주어 씨 뿌릴 곳으로 한다.
10) 以畝爲率 令一畝之地, … 町間, 分爲道, 以通人行. … 尺直橫鑿町作溝. 溝廣一尺, 深亦一尺. 積壤於溝間, 相去亦一尺. (嘗悉以一尺地積壤, 不相受, 令弘作二尺地以積壤.)
11) 본문에 발지(茇之)라 하였는데 이는 뿌리를 깊이 내렸거나 내리게 될 풀이 돋는 것이므로 철저하게 방제하기 위함이다.
12) 區中草生, 茇之. 區間草, 以利剗剗之, 若以鋤鋤. 苗長, 不能耘之者, 以鎌此地, 刈其草矣.
13) 구자옥·김장규·홍기용 역주(2007) 「범승지서(氾勝之書)」, 한국농업사학회-「區田」
14) 王禎 「農書」 引作 「務本新書」: 其區當於閑時 旋旋掘下 正月種春大麥 二三月種山藥芋子 三四月種粟及大小豆 八月二麥豌豆
15) 崔漢綺(1830?) : 節次爲之 不可貪多, 농촌진흥청 고농서국역서 10 (2005), 「농정회요」
16) 馬宗申校註(1987) 「授時通考(1737年)校註」 第一冊 上宜農業出版社 : “若糞坮待法 沃灌以時 人力旣到 則地利自饒 雖遇災不能損耗 用省而功倍 田少而收多 全家歲計 指期可必 實救貧之捷法 備荒之要務也
17) 앞(16)의 책 : 區田, 不耕旁地, 庶盡地力.
18) 구자옥·김장규·홍기용 역주(2007) 「범승지서(氾勝之書)」, 한국농업사학회 - p.80(뜻풀이)
19) 閔成基(1973):「朝鮮農業史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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