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원예(園藝) 육성정책(育成政策)
04-02. : 조선 후기의 원예(園藝) 육성정책(育成政策)
[옛 기술 및 지혜]
원예품은 식량과 같은 필수품이라기보다는 공물(貢物)로 받아서 특별한 용도로 쓰거나 즐기기 위한 세도가들의 식품으로 장려되는 수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44년의 「속대전」 공전조(工典條)에서 규정하기를 “장원서(掌苑署)가 경영하는 용산·한강 등지의 과수원을 짓밟아서 손상을 입힌 자에 대해서는 금엽(禁獵)의 예에 따라 죄를 논하고 제주 3읍에 있는 희귀한 과일나무는 주민들로 하여금 심어 가꾸게 하며 그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살펴서 상벌을 주어 권장 또는 징계한다” 하였다. 또한 여기에 주(註)를 달아 보충 설명하기를 “당감자(唐柑子)·당유자(唐柚子) 각 8주(株), 유감(乳柑) 20주, 동정귤(洞庭橘) 10주를 심은 자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당감자·당유자 각 5주와 유감·동정귤 각 15주를 심은 자에게는 면포(棉布) 30필을 준다. 만약 상을 받거나 호역면제를 받은 후에 가꾸는 데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나무가 말라 죽거나 손상된 경우에는 상포(賞布)를 반납하도록 하고 또 호역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호역을 면제받은 사람이 심은 (과일) 나무수를 6년마다 통산하여 원수(元數) 이외에 배수(倍數)를 심은 자에게는 헤아려 상포를 주며 정기적인 보고 때마다 임금에게 보고한다”고 덧붙이고 있다.1)
한 편 공물로 진상하던 규정도 제한하고 있었다. 영조(英祖) 37년(1761), “탐라에서 진상하는 감귤이나 유자가, 이제 듣자 하니, 세손궁까지 공상한다고 하는데 차후에는 하지 않도록 영원히 제도화하라”는 하교가 있었다.2)
[토의 및 평가]
「한정록(閑情錄)」에 이르기를 “곡식이 여물지 않아 굶주림은 기(饑)라 하고 채소가 여물지 않아 굶주림을 근(饉)이라 한다”라 하여 기근(饑饉)이라 할 때는 곡식과 채소가 모두 성숙하지 못하여 굶주리는 때를 뜻하였다.3) 즉 채소도 곡식과 대등한 정도로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농정에 있어서는 채소류의 권농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나 관심이 없었고 (소홀하였고) 진상되어 오는 과일류나 특수 용도의 과채류 확보에만 신경을 써서 이를 우려하고 확보를 이행하기 위한 시상규정까지 제정하고 있었다.
「속대전」 공전조에 명시하거나 보충설명 또한, 결코 농민들의 소득이나 국가 경제를 위한 시책이 아니었고 백성들의 식생활을 향상시키려는 정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며, 장차 공물(貢物)로 걷어 갈 자원을 확보하려는 시책의 일환으로 사탕발림식의 시상규정까지 두었음에 틀림없다. 자가농사로 여겼다면 구태여 시상까지 할 것도 없고, 망하기로서니 벌까지 줄 이유가 있겠는가?
[결론 및 시사점]
요즈음에 이르러서도,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늘고 이것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 국내 생산을 장려하며 각종 지원혜택을 주다가도 슬그머니 못 본 체하여 차후의 생산이 도산하는 사례가 있다. 조령모개식의 정책이나 우선 화급한 문제를 미봉책의 선심시책으로 메꾸고 넘기는 시책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농민을 위한 것도, 또는 사회나 국가를 위한 어떤 것도 될 수 없고 다만 책무를 진 관리들의 임기응변식 낭비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인용 및 설명문]
1) 金榮鎭·李殷雄 (2000) 「朝鮮時代 農業科學技術史」 서울大學校 出版部.
2) 「英祖實錄」 卷 98, 英祖 37年 11月 癸卯日條 : “敎曰 … 耽羅柑柚供上 今聞 世孫宮有之 此後勿爲供上 永爲之.”
3) 「閑情錄(1611) : “穀不熟曰饑 菜不熟曰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