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60) 전 미국 대통령이 ‘빈곤과 질병 추방’과 ‘환경 보호와 자선의 세계화’ 등 초대형 글로벌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성공한 전임 대통령’ 대열에 올라서는 동시에 차기 노벨평화상 후보까지 거론되는 등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제42대와 43대(1993년-2001년)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까지 각종 스캔들로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꼽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에 선정될 정도로 악평을 받았으나, 퇴임 후 클린턴재단과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 등 세계발전을 위한 각종 프로젝트로 화려하게 부활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섹스스캔들과 빚더미에서 세계적 명사로 부활
클린턴은 퇴임때만 해도 퇴임전 백악관의 여직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탄핵까지 가는 불명예를 안은 데다 퇴임 당시 1천만달러에 달하는 빚더미에 올라 정치-경제적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역시 천재였다. 그는 2005년부터 자신의 명성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기업과 경제인 및 정치인과 예술가 등을 총집결시켜 개도국 정부와 미국 등 선진국의 비정부기구, 돈 많은 개인·재단·기업 등을 연결해주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사상 초유의 거대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키면서 세계언론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의 시사 주간 <내셔널 저널>은 “역대 어느 전직 대통령도 추진해 보지 못했던 야심찬 계획”이라고 호평했고, 경제전문지 <포춘>도 “스스로 돈을 갖지 않고도 세계적인 규모의 자선사업을 펼치는 클린턴의 방식은 낙관주의와 실용주의가 결합된 클린턴만의 스타 파워에 기반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이들 언론은 “클린턴 재단은 전통적 관점과 달리 돈 한 푼 없이 거액을 모금한 뒤 이를 어린이와 에이즈환자 등을 위해 사용하는 새로운 기부문화를 창출하고 있다”고 놀라와 했다.
제42대와 43대(1993년-2001년)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 전 대통령 ⓒ 클린턴재단
대단한 클린턴 파워, 사흘만에 73억달러 모금
지구촌 곳곳의 기아와 분쟁의 현장을 찾아 각종 현안들을 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는 클린턴의 양대 중심축은 ‘클린턴 재단’과 ‘클린턴 대통령센터’가 추진 중인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다.
클린턴은 2000년 퇴임 뒤 5년여 동안 조직 정비 및 네트워크 확장 등 준비 기간을 거쳐 2005년 CGI 플랜을 발표했다. 빈곤, 지구 온난화, 종교간 화해, 제3세계 정부 개혁 등 4대 프로젝트가 CGI 플랜의 골자.
클린턴은 ‘후천성면역결핍증(HIV/에이즈) 이니셔티브(CHAI)', 스코틀랜드 최대 갑부 톰 헌터 경과 함께 아프리카 말라위와 르완다 빈곤층을 돕는 ‘클린턴-헌터 개발이니셔티브(CHDI)’, 2005년 8월 클린턴 전 대통령과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카트리나-쓰나미 복구’, ‘클린턴재단 기후변화이니셔티브(CCI)'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면서 각종 국제기구와 기업 등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하는 한편 국제기구들과의 협조를 통해 성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는 클린턴 전 대통령 ⓒ 클린턴재단
클린턴은 2005년 9월 CGI 첫 회의에서 이어 지난 2006년 9월 뉴욕에서 개최한 CGI 프로젝트 출범식에서 “부(富)의 독점보다 함께 나눠쓰는 것을 고무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며, 이는 10년 안에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강조하며, 세계인들이 자선과 기부의 행렬에 동참할 것으로 호소했다.
클린턴의 브랜드 파워는 대단했다. 프로젝트 출범식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압둘라 요르단 국왕,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 엘런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 등 현직 국가 수반이 25명을 포함한 전 세계의 유력 인사 2천2백여명이 참석했다. 또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정부 대표 사절로 보내 축하했고,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로라 부시 여사를 비롯,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물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영국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록그룹 U2의 보노까지 집결했다. 클린턴 재임기간 중 클린턴을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터 그룹 회장도 참석했다.
이들 명사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영국의 괴짜 사업가로 유명한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은 이날 모임에서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30억 달러를 지구온난화 방지 연구와 대체에너지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항공산업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가 전체의 2%를 차지하는 만큼 항공업계는 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클린턴 프로젝트에 적극 힘을 실어줬다. 브랜슨 회장의 기부에 힘입어 클린턴은 재생에너지를 위한 10억달러 규모의 투자펀드를 쉽게 구성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에서 1억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갑부 기업가인 톰 헌터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클린턴재단
또한 스코틀랜드 최고 갑부 기업가인 톰 헌터는 2개의 빈곤국을 지정해 사용할 수 있도록 향후 10년에 걸쳐 1억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스위스의 재보험회사 RE는 청정 연료 개발비로 3억달러를 기부키로 했다. 멕시코의 통신재벌인 슬림 헬루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 지역인 가자지구의 무선 통신망 인프라 구축 사업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모친은 케냐에 병원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로라 부시 여사는 처음으로 미 국제개발처(USAID) 등을 통해 1억6천4백만달러 기부의사를 밝혔고, 방글라데시 왕립진보위원회는 케냐와 탄자니아 등의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2억5천만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사흘간 진행된 뉴욕 행사에서 클린턴 프로젝트 참여를 공약한 건수는 2백16건, 기부금 총액은 무려 73억달러(약 6조8천9백억원)에 달했다. 2005년 행사에서 3백여명이 총 25억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정한 것에 비해 올해는 3배 가까이 기부금이 늘어나는 등 갈수록 프로젝트의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레소토를 방문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에이즈환자 시설을 돌아보며 환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모금된 기부금을 ‘특정분야에 한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있고, 운용은 벤처자본가 비노드 코슬라와 수퍼마켓 재벌 론 버클, 할리우드 프로듀서 스티브 빙 등 월가 출신의 전문가 및 기업 담당자들이 전담하고 있으며, 제임스 D 울펀슨 세계은행 전 총재가 펀드 운용 이사로 영입됐다.
“클린턴, 현지서 승용차 이용않고 비행기도 일등석 거부하며 솔선수범”
클린턴은 검박한 생활태도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포춘>은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재단 관계자들은 현지에서 운전기사와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으며, 해외출장 시 항공기 일등석도 거부하는 등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부자가 아니라도 어떻게 자선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기부문화로서 열정적으로 아프리카를 누비고 있는 그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격찬했다.
<포춘>은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재단이 항상 방송 카메라와 함께 하고 있고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것이 그렇다. 또 그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단지 돕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약속은 지나치게 하고 실천은 적게 한다는 말도 나온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통해 자신의 신용을 쌓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며 “그러나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고 일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처럼 기업 이사회 같은 곳에 들어가기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점들에 대해 공세를 취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있다”고 그를 옹호했다.
월가 헤지펀드인 론 파인 캐피탈 사의 말라 가온카 펀드매니저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규모와 야심은 정말 놀랄 정도”라며 “클린턴 재단은 항상 ‘여기 결과가 있다. 여기 이런 계산들을 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일을 이뤘는지 나타나 있다’라고 하며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성과를 낸다”며 클린턴이 직접 뛰면서 내놓는 실적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추진하면서 클린턴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1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와 자선사업 현장에서 보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88회 생일잔치에 나타났는가 하면 말라위, 레소토,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을 순방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글락소 등 다국적 제약회사들과 협상을 벌여, 이들이 사용하는 에이즈 약과 진단시약의 값을 종전의 연간 1만달러에서 2백~5백달러 수준으로 낮추기도 했다. 특히 전 세계 에이즈 감염자의 70%가 있는 사하라아프리카 지역에 연 2백달러 이하로 약값과 진단비용을 낮추도록 한 것도 그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국경없는 의사들’의 공동작품이었다.
현재 클린턴 재단의 직원 5백70명중 4백91명이 에이즈 퇴치 문제에 투입될 정도로 클린턴은 에이즈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클린턴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클린턴은 노벨평화상 후보, 부인 힐러리는 2008 유력 대선주자
클린턴은 올해 아프리카 방문 후 가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나는 사람과 정치와 정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다"며 "그러나 정치를 벗어난 지금 내 관심은 사람과 정책뿐이다. 나의 가장 큰 성취동기는 내가 이 일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한다면 이는 도덕적인 의무감에 따른 것일 게다. 그러나 이것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이 일은 나에게 성취동기를 불어넣는다”고 덧붙였다.
클린턴은 어린 시절 도박사에다 알콜중독자였으며 자주 술에 취해 아내를 폭행하고 이복동생인 로저 주니어를 구타하는 양부의 폭압 속에서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클린턴이 이제는 환갑이 돼 세계 곳곳에서 자선과 기부 행렬을 이끌고 노벨평화상 1순위로 꼽히고 있다. 대통령 퇴임 후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 아니라,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언론들은 클린턴이 조만간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2008년 대선에서 부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클린턴’이라는 고유명사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단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