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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지난 13년은 일본 극우의 길”

[심포지엄] "아베의 과거는 일본 왜곡교과서의 역사"

한일 양국 시민단체들이 일본 내 우경화 바람, 특히 교과서 왜곡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상임대표 이수호)와 ‘어린이와교과서네트21’을 비롯한 한일 양국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은 23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동아시아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일본 내 역사교과서 왜곡 움직임에 대한 공동 대응과 협력방안을 모색했다.

이 날 심포지엄의 화두는 역시 오는 26일 일본 새 총리에 정식 취임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52) 집권 자민당 총재가 이끌 향후 일본의 문제였다. 특히 참석자들은 아베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으며 ‘아시아 평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 4월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아베 일본 차기총리. ⓒ연합뉴스


“지난 13년의 아베를 보라. ‘극우 정치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발제에 나선 일본측 대표 타와라 요시후미(俵義文.65)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사무국장은 “의원이 된 후 13년간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극우 의원연맹 중에서도 항상 요직의 지위를 맡고 있었던 것이 아베 신조”라며 “아베는 자민당 내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극우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타와라 사무국장은 극우일본 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집필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왜곡 교과서의 채택저지 운동을 전면에서 이끄는 인사다. 앞서 타와라 사무국장은 출판노동조합에 몸담으며 지난 25년동안 일본 내 ‘바른 교과서 운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타와라 사무국장은 후소샤판이 2000년 4월 일본 문부성(우리의 교육부에 해당)의 검정을 최초로 통과하자 부당검정에 항의해 소송투쟁을 하는 등 일본 내 극우와의 전면전에 서 있는 인물이다. 지난 1998년부터는 새역모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 21'을 결성해 교과서 채택 권한이 있는 일본 내 지역교육위원회에 교과서가 채택되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캠페인과 양심 운동을 이끌고 있다.

그런 그가 신임 총리에 오를 아베를 ‘극우파’로 낙인찍은 것은 아베가 보여준 지난 13년간의 전력 때문.

한일 양국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표면화 된 것은 2000년 4월 새역모가 만든 과거사 왜곡 후소샤판 교과서가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면서부터다. 1997년 1월 발족한 일본 극우단체 새역모는 자국의 과거 침략전쟁을 철저히 부인하며 위안부 문제, 난징 대학살 문제 등을 모조리 부정하는 역사왜곡 교과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새역모는 결코 갑자기 출현한 단체가 아니다. 지난 1993년 집권 자민당 내에서 ‘역사검토위원회’가 설치되는 데 바로 이 위원회가 새역모의 전신인 셈이다. 이 위원회는 후소샤 왜곡교과서가 현재 기술하고 있는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닌 성전”,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문제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거짓을 맨 먼저 주장하고 있던 의원들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지난 93년 최초로 일본 의회에 진출한 아베는 바로 이 위원회 1백5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역사왜곡 교과서와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타와라 요시후미 '어린이와 교과서 네트21' 사무국장은 "아베의 지난 13년간의 정치활동은 극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동현 기자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의 외손자가 바로 ‘아베 신조’ 신임 총리

사실 아베 신조의 집안 내력을 돌아보면 그가 일본 내 강경파 그룹을 이끌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읽을 수 있다. 아베의 외조부는 태평양 전쟁을 이끈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년11월13일~1987년8월7일) 전 수상이다.

아베의 아버지 또한 전후 일본 정가를 이끈 아베 신타로 전 자민당 간사장(安倍晋太郞, 1991년 5월 사망)이다. 아베는 아버지 사망 전 아버지의 비서로 정가에 입문, 지난 1993년 7월 아버지의 선거구였던 야마구치현에서 처음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비교적 극우적 색채를 띠는 정치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일본 정가에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베 신조는 아버지 신타로 보다는 생전의 기시 노부스케 외조부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을 만큼 가까웠다는 후문이다.

당시 초선이었던 그가 자민당의 강경파 그룹인 역사검토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던 것은 그의 뚜렷한 정치적 지향점을 읽게 하는 대목이었다. 아베는 이후 자민당 내 강경파의 대를 잇는 인물로 부각됐다.

아베, 새역모 모태에서부터 깊숙히 관여

특히 97년 새역모 발족 한 달 만인 97년 2월 27일, 아베는 자민당 내 5선 이하의 비교적 젊은 의원들을 주축으로한 ‘일본의 전도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을 결성해 초대 사무국장에 올랐다.

새역모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역사검토위원회’를 거친 ‘젊은 의원 모임’의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새역모가 만들어 내는 교과서가 일본 각 지역에 교과서로 채택되는 데 전방위 지원하는 것이 이 모임의 숙명이었다.

타와라 사무국장의 지적에 따르면 아베가 이끄는 이들 ‘젊은 의원 모임’은 97년 문부성 과장과 교과서 회사 사장, 교과서 집필자 등을 불러 침략전쟁과 위안부 문제를 기술하고 있는 현행 교과서들을 격렬히 힐문, 추궁했다.

‘젊은 의원 모임’은 또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제국군대와 일본정부의 관여를 인정하며 도의적 책임과 사과를 표명한 1993년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에 대해 “확실한 증거도 없이 ‘강제성’을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인정했다”고 비난하며 고노를 직접 불러 철회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타와라 사무국장이 지적하는 그간 아베가 보여준 극우적 정치행보는 더 있다. 아베는 지난 1997년 5월 29일 자민당 내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일본회의 의련)를 조직한다.

일본회의 의련은 ‘역사∙교육∙가정 문제’ , ‘방위∙외교∙영토문제’, ‘헌법∙왕실∙야스쿠니 문제’ 등 3가지 프로젝트를 마련해 향후 일본 의회가 적극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 삼았다. 아베는 이 조직의 부간사장 자리를 꿰차며 핵심라인에 올라섰다.

‘천황중심의 신의나라’를 지향하는 정치 결사체 ‘신도정치연맹’과 연대하는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에서도 아베는 사무국장을 맡은 바 있다.

한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일, 한중일 국가 간 시민단체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결속"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동현 기자


"아베와 네오나치 정당 당수 하이더는 동급"

타와라 사무국장은 정계입문 후 13년간 아베가 보여준 이같은 극우적 정치행보를 문제삼으며 “오스트리아 네오나치 지지정당의 당수 하이더와 아베는 물을 것도 없이 똑같은 극우 정치가”라고 주장했다.

반유태주의와 외국인추방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자유민주당 하이더 당수는 지난 2000년 보수정당과 '극우-보수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연합정부가 탄생하자 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내 시민들이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까지 달려와 반대집회를 여는 등 당시 네오나치 정당의 집권은 유럽연합을 붕괴시킬 만한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타와라 사무국장은 바로 그같은 하이더와 아베를 '동급'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타와라 사무국장은 더 나아가 “아베가 불과 13년만에 자민당 총재가 되어 일본의 수상이 된 것은 아베의 혈통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같은 자민당 안에서의 극우 정치가, 역사 왜곡 정치가로 성장하며 그와 정치 신조를 같이 하는 정치가들이 자민당의 중심에서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등의 배경이 있다”고 지적했다.

타와라 사무국장은 구체적으로 “아베는 최근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의원이 된 후 ‘요즘 훌륭한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존경하는 선배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며 “그 ‘훌륭한 동료’란 나카가와 쇼이치 농수 대신이나 히라누마 다케오 전 경제산업 대신을 시작으로 한 ‘젊은 의원의 모임’과 일본회의 의련 등의 멤버로, 오쿠노 세이스케와 이타가키 다다시, 모리 요시로 등의 강경파&#8729;극우 정치가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타와라가 ‘아베의 훌륭한 동료’로 지적한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농림수산상은 새역모의 핵심 멤버이며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전 경제산업상은 지난 해 자민당 내 경쟁 파벌인 예컨대 지난해 경쟁 파벌인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간사장이 '인권옹호법안'을 제출하려 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막은 인물이다.

또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자민당 의원은 지난 1996년 7월 1일 “위안소는 업자가 운영했다”고 망언한 장본인이며 이타가키 다다시(板垣正)는 역사검토위원회의 초대사무국장을 지냈으며 A급전범인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아들이다. 모시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 수상은 신사참배를 강행하며 도쿄 전범재판성의 부당성을 들며 ‘A급 전범 무죄론’을 제창,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한-중-일 3국 시민연대

이같은 전력을 들어 아베 신조가 앞으로 일본 역사왜곡교과서의 채택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한일 양국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한일 양국을 포함, 한중일 역사교과서 관련 시민단체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던 때는 지난 2001년 경이다. 당시만 해도 후소샤 교과서 문부성 검정 통과에 위기 의식을 느낀 한중일 양심세력과 시민단체들이 교류와 조직적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 시점, 아베 신조의 새 일본이 나아갈 방향은 2001년 당시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심각한 상황으로 한중일 연대는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한중일 3국 시민연대의 중요성은 두 말의 여지가 없다.

타와라 사무국장을 비롯한 이 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일 양국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평화를 위한 결속과 연대'를 다시한번 강조했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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