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손자의 꿈
-= 12세 손자의 꿈 =-
유수(流水)와 같은 것이 세월이라 했든가?
지나간 세월을 도리 켜 보느라 쓰려다가 만 글들을
살피던 중 벌써 삼년 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위와 같은
제목에 글을 발견하고 책임감과 속죄라는 막연한 감회로
글에 마무리를 위해 부족하고 못난 속내를 드러내고 자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어느 새 중학교 2학년이 된 손자가
3년 전에 이 못난 할아비에게 토로한 속마음이다.
『외할아버지 저 꿈을 바꿨어요.』
『그래? 무엇으로?』
『대통령이 되려고요.』
『대통령?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학교를 없애려고요.』
『학교를 없애는 것보다 학원을 없애는 것이 더 좋잖아?』
『그럼 큰일 나요.』
눈에 넣고 살아도 아프지 않을
셋째 딸이 난 1녀 3남 중 장남인 큰 녀석에 말이다.
첫째는 여아로써 중학교 2학년생이며 둘째부터는 사내아이로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그리고 세상에 나온 지 7개월짜리가 한 세트(?)다.
누구나 같은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못난 내겐 사랑스러운 딸을
힘들게 하고, 나 자신을 보다 더 늙은이로 만드는 듯싶어 손주(孫株)들
이라는 것이 친 딸과는 감정이 조금 다르다. 그런 큰 손자가 이즈음엔
나에게서 자기 엄마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제게로 빼앗아 가는 것을
느끼며 당혹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무튼 심정이 복잡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삶에 있어 너무나 무책임한 것이 아닌 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천진스러워야할 어린 아이한테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조그마한 머리에 자신이 성장 후 이뤄야할 것들을 말할 땐
더욱 그 같은 상념에 어린이이들 한 테 죄를 짓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혀 숙연(肅然)하여지기까지 하는 데엔 미래를 짊어진
이 시대의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조이기 때문이리라.
어느 시대에서나 할아비가 손자에게 품는
사랑에 농도는 같을 것이다. 다만, 다름이 있다면
그건 손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시대적 여건에 차이뿐일 것이다.
기왕에 지나간 시대야 편한 마음으로 아듀(adieu)의
미소를 뒤 꼭지에 매달아 주고, 오늘 이 시대에
촉각의 더듬이를 한껏 뻗어 매만져 보자.
과거, 사실 이 같은 낱말을 붙여 주기엔
조금은 미안스러운 감정이 들지만, 아무튼 그리
오래지 않은 시대, 30여년 전만해도 엔지니어(engineer)로
살아온 내가 나름에 생각을 피력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엔 물질문명들이 발달이 미숙하여 본인에 소기의
목적을 제대로 표방내지는 표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진실로 깨달아야 하고, 어느
때보다도 더 진솔하고, 깊고 깊게 생각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기성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 딴에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하교하고, 게서 시간을 보내다가 늦게 귀가하는 모습이
가여운 생각에 놀 수 있는 시간이 보다 많아지려면 학원이
없어짐이 아이에겐 좋을 듯싶어 한 말인데, 손자 녀석이 저 같은
말에 정색을 실어, 하는 말인 즉, 배우지 못 한다 는 게 아닌가?
사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배운다는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시간 시간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으며 살고 있다.
그것은 삶이라고 하는 자체가 더 할 수 없는 스승이며
저마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믿음과 의지력이
강하다고 한다면 그 만큼 삶을 오밀조밀하게 분해하여
그 안에서 자기 자신만의 색깔을 도출해 낼 수 있음을 믿기에 말이다.
그 같은 생각을 하는 내게, 한창 뛰어 놀 저 같은 때에
배워야 한다는 마음을 강하게 심어 준 것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오늘 이 시대엔 어설프게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게 한다는 어리석음을 떨쳐 버려야 한다.
다만 우리 아이들에 인성을 가다듬어 주어야 하는데
이 것 마저도 섣불리 행하는 것조차 삼가 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인성이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조건과 여건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기에 말이다.
정녕 그대들은 자녀들의 안락한 삶을 원하는가?
그에 대한 정답은 바로 여러분들을 포함한 우리가 쥐고 있다.
보라-! 우리 사회에 만연된 낱말들 가운데 보수다, 진보다,
기회주의다, 라는 말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미래로의
발전을 극구 만류하고 저해하는 낱말임을 상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 내면을 들여다보면 저들 나름에 충분한 이유와 명분은 있다
하겠으나, 그 역시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저 나름에
이익을 앞세웠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학교를 없애겠다는 12세 순수한 손자의 바램역시 다르지 않다.
배워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또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나름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바가 있음으로
그 같은 생각을 피력한다는 사실을 주시하여야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오늘과 같이 총체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함몰 된 것과 결코 무관 할 수 없다.
거창하게 세계를 운운하며 미래를 들먹이지 말고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에서 한 예를 들어보자.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피 할레야 피 할 수 없는 지겨운 밥벌이일 것이다.
그로써 나름에 직장이라는 곳을 찾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짚어보자.
아마 모르긴 해도 모든 직장인이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보다는 소속된 직장에 최선의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해있는
식솔들의 안위가 달려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말이다.
사실 이 같은 것들이 모체가 되어 우리 모두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여기엔 반드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주어지기에 말이다.
이로써 만연되는 것이 곧 자기 자신보다 나은 꼴을 볼 수없는
자기 보호본능이 생동하기 때문임을 잘 알 것이다.
해서, 자기보다 난 사람 앞에서는 그에 지식을 알겨내기 위해
간을 베어주고 쓸개를 뽑아 먹일 듯이 간살을 떨어 대지만 그 뒤로는
그에 반하여 약점을 읽어내기에 바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면 이 같은 현상이 단순히 직장 동료 간에 만 있는 일인가?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과일을 놓고 보더라도
그 때깔이 좋고 모양에 균형이 잘 잡히고 알이 굵어 먹음직스러우면
그만 못한 것들에 비해 값이 비싸도 그 가치를 인정을 하나
유독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에 반한다는 사실이다.
예로써, 제가 가진 것이 부족할수록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능란하여 아첨을 잘 떨게 되며, 또 그것이 곧 상사에게 인정을 받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끈임 없이 그 방면으로 진화시킴으로
해서 그 자신의 핸디캡을 상쇄시킨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로 우리 사회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권모술수자의 밥 역할을 하는 조금은 난 자를 보자.
자신이 하고 있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그 만에 기술을 습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할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자연스럽게 주변과 어울리기 보다는 자기개발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이 더더욱 확대됨에서 오는 주변과의
소원(疏遠)함이 오히려 권모술수에 능한 자에 먹이 감이되게 마련인데
여기서 결코 웃지 못 할 것은, 대다수의 오너들에 졸부 적 근성에서
오는 자세로 그들이 풍기는 기운들이 한 몫을 더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역시 그 사회가 안겨 준
오너들의 생태에 일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로써 속살을 채운 자가 자기의 속살을 들어내어
주변으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되고픈 마음이 들다가도
자신의 약점을 들어 일을 위해 자신의 체중관리 차원에서
점심을 의도적으로 굶어가며 간식으로 들여지는 빵도 사양하고
우유하나만을 바라보는 그에게 체질 적으로 악재가 될 뿐,
결코 현장에서 간식으로 치부할 수없는 과자 따위로 돌리는 의도적
행위자들에게 과연 그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그가 터득한 속살을 들어내 보이겠는가?
그것도 제대로 급여가 나오지도 않는 업체에서...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자신이 행하고 있던 모종에 기기
개발을 위해 미진한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종국엔
그 미흡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특단의 방법을 터득 하였다고
해서, 자신이 그 간에 쏟아 부은 정성과 재원이 아깝다고 해서
선뜻 그 같은 사안을 내 놓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같이 수고한 노고가 보장되기는커녕 오히려
간한 자들에 의해 기술은 도용되어 지고, 어떻게 하든
기업에 비용을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제법 입빠른 소리로 주위를
환기시키고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재다운 인재도
헌 신짝 벗어버리듯 퇴사시키고 한다는 소리가 너무 바른 소리로
융화할 줄을 몰라서 내 쳤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도
그 직원이 퇴사 후에도 무시로 불러들여 그가 맡던 업무를 위해
자문을 구하는 모습을 질질 흘리는 과정으로만 봐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보다나은 보수는커녕 이용의 도구로
전락되어질 상황이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경우가 우리나라 기업 전반에 보편적으로 깔려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 하는 것으로 이로써 그 기업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행보를
구현할 수 없다는 데에 우리 모두가 촉각을 세워야 하겠다.
갖은 권모술수로 속살의 색감을 봤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같은 색감을 창출한자가 원하는 고단가의
급여를 주지 않아도 그 색감을 도출해 낼 수는 있겠으나
그 이외의 것을 창출하는 데에는 반드시 문제가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엔 처음에 그 같은 색감을 안출해 낸 자만의 노하우들로
색감을 도출해 낸 것이기에 그가 아니면 그 누구라 하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듯이 어떤 모종의 신상품을 창출함에 있어서도
그가 아니고는 쉽게 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각 버스정류장마다 설치되어있는
어눌한 교통정보시스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모르긴 해도 거기엔 반드시 두 가지 요인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같은 시스템을 입안한자가 있음에도 어떤 이유에서
그 입안자는 입안한 것으로 도중에 도태되었거나, 아니면
본인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본인에 경험을 토대로
떠들어댄 도서관에서 1997년 11월 이전만 하더라도 무시로
열람을 할 수 있었던 학술 및 학위논문들을 이 못난 위인에 제안으로
제안에 대한 답변대신 그 많은 논문들을 전국에 널려있는 도서관들이
일거에 특설장소에 감추어둔 수많은 자료에서 몇몇 사람들의
어설픈 식견으로 추출해 낸 결과일 것이 명명백백하기에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못난 위인의 상식과 식견으로도 지금과 같은
어눌한 시스템이 아니라, 보다 똑똑하고 정확한
시스템으로 구현하였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상황과 예들은 우리 주변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더더욱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같은 예로
생떼 같은 생목숨이 한낱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으며,
가뜩이나 이렇다 할 부존자원이라고는 전무한 나라일망정
고린 동전 한 푼을 들이지 않고도 자동차와 같은 운송기기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 했음에도, 이 같은 기술을 원천적으로
생성할 수 없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는 사회 기조가 무엇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 이는 자동차에
장착된 어눌한 에어백이 인명을 아사가고, 화석연료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알려진 것들 말고도 얼마든지 그보다 더
탁월한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제 아무리 흔한 자금도 쉽게 융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혹자들은 이런 의혹을 나타낼 것이다.
『세계적으로 지적보호시스템이 만연되어 있는데 기우가 아닌가?』
라는 의문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제기 하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순박한 분이라고 넙죽 엎드려 그 순수함에 경의라도 표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사회현상들은 어디로부터 야기 되었는가가
초미에 관심사이자 그에 대한 해결책 또한 그에 못잖을 것이다.
과연 그 같은 것들을 일거에 날려 보낼 묘안이나 묘책은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명료하게『있다』라고 호언장담 할 수 있다.
이 같은 장담에 혹자는『그래 할 수 있지. 이번 대선이야 말로 제대로
된 자로 야당에 누구를 선택해야 돼』라든가『오늘에 이르기까지
별별 잡놈들을 다 보았으니 그래도 여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비가 닦은 후광이 있는 아무개를 뽑아야 돼』라고 저마다 입가에
게거품을 물겠으나, 하나같이 잠에서 깨라고 종용하고 싶다.
아니? 종용하기보다『정녕 그 같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멸종을 맞게 될 위험에 처할 것이다』라고
단언 할 것이다. 과연 그 같은 사실이 과대망상일까? 정리해 보자.
민주주의 국가로써 헌법에 명기가 된 부분을 상고해 보자.
헌법 제1장 총강 제1조 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우리 모두 작금에 이르기까지 66년이라는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우리 대한민국에 들어와 우리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 마치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처럼 선거철에 왈 민주주의에
꽃이라고 하는 투표행사 말고는 딱히 있었는가? 그런 일이 있고
기대와 여흥이 채 식기도 전에 우리가 안겨준 권력의 칼끝을
우리들의 목에 겨누고 민초들의 삶을 빌미로 으름장을 놓고 여당과
야당이 당리당략으로 줄다리기를 해온 것이 어디 한 두 해이며,
한 두 번인가? 늑대 소년으로 비유하자면 백발이 성성한 노구로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할 나이라기보다, 우리의 탁월한 민족성들
가운데 세계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가슴에 드리워진 되에
해당하는 통빡 이라고 하는 되빡으로 아무리 인심이 후한 아낙의
그 모습으로 넘치게 담고, 그에 만족하지 않고 흔들어 자자진
그 위에 더 얹어 담는 후함을 한껏 드려 봐도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에 대접은 없었다.
그리고 아비가 닦은 후광이라 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 시대가 시대인 만큼,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라마다 발전에 보폭을 늘려가던 시기였기에 그 시대, 그 시절에
그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간에 제대로 된 사고자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발전과 발달은 별 어려움 없이 이뤄 냈었을 것이다.
아니? 어느 면에서는 그 자신이 친일적 사고와 행적이 있던 것에
반(反)하여 진정으로 나라의 유구하여야 할 미래를 조금이라도
염려하는 자가 그 시대에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더라면,
오늘과 전혀 다른 모습에 국가관을 가진 젊은이들로 보다 활기찬
국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마저
강하게 엄습해 오지만 어쩌랴 이미 쏟아져 흙 속에 자자진 물인데...
여기서 우리 모두가 진솔한 마음으로 우리 주변을 휘~ 하니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우리들의 아이들에 미래의 삶만을 생각하며
둘러보라-! 거기에 보이는 문물들이 하나 같이 저마다의 그 발달과
발전에 보폭이 더 할 수 없이 넓어져 있음이 보일 것이다.
이렇듯 더할 수 없이 좋은 시대에 개인이기주의를 팽배케 하며
그 이기주의로 마치 불이 난 지하 룸싸롱과 진배없는 꼴과 같이 좁은
문틈으로 일시에 밖으로 나가려는 형국을 닮은 모습을 연출하는
현 시대상에서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저마다의 삶을 통해 얻어진
노하우들을 정보와 기술이 곧 현금과 다름없는 시대상에서
편하게 내 놓지 못하고 저마다의 가슴이라는 쪽문 안에 가둬 논
형국이 아닌가? 지 쩍 보호제도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어느 일 개개인의 치부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국가산업발전을
촉진한다는 미명아래 그 내막을 제대로 알 리 없는 순수한 개발자들에
마음을 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의 지름길로
등을 떠미는 꼴을 자아내고 가진 자들로 하여금 그 기술을
활용토록 조장되어지는 사회기조가 안출자들에 안출 의혹을
한 번 더 죽이는 꼬락서니로 이는 마치 전장에서
적의 생사확인을 위해 확인 사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정치성이 만발하고 개인 이기주의를 양산하는 민주주의를
언제까지 그 지저분한 바짓가랑이를 움 껴 쥐고, 저 싫다
떠나는 임을 부둥켜안듯 못나고 애절함을 지고지순토록 연출하려는가?
이제까지 제 본분을 다한 그를 홀가분하게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자.
그리고 일 만년의 유구한 민족적 역사로 다져진 홍익인간사상을
이 시대에 진정한 제 맛과 제 멋을 제대로 낼 수 있는 홍익주의로
개진하여 지나간 일 만년의 세월에 거쳐 흔들고, 두들기고, 쥐어
짜여 진 우리 민족적 품성인 냄비근성과 적당 이라는 정신천칭을
가늠할 줄 아는 그 것에 가슴으로 담아낼 수 있는 통빡 이라는
수준 높은 도량(度量)에 살신성인(殺身成仁)적 자질이 체질화된 것에
그치지 않고 유아수출국(乳兒輸出國)이라는 세상에 더 할 수없는
오명으로 흩 뿌려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느 때라도
무시로 상대국을 찾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농익혔는가 하면
거기에 우리 민족적 심성이 이웃집 마실을 가더라도 밀전병 한 두
조각 쯤 부쳐가듯 대상국을 찾더라도 그들의 형편과 사정에
부합된 기기 및 기구나 문화적 가치를 전위시킬 수 있는
여건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음에 우리 모두 고무하여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때에 우리의 마음가짐은 나와 우리가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 자세와 이제껏 우리 곁에서 우리들의 사고에 지표처럼
군림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과거를
쿨~ 하게 떠나보내고 새 시대로 에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이에 혹여, 자기 자신에 식솔들이나 제 이웃 하나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불특정 다수를 사랑할 수 있겠냐고
비아냥거리거든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자. 이즈음 홍수가 저지른
행보에서처럼 갖가지 가재도구들이 세찬 물살에 휩쓸려 바닷가에
이르게 된 각양각색의 가구 집기들과 잡동사니들을 보라-!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대하게 되면 형용하기 어려운 지저분한 몰골과 악취로
잠시일망정 대면하기 거북스러울지라도 멀고 먼 거리에서 바라
보노라면 그 같은 잡동사니들이 물과 한데 어우러져 저들 나름대로
햇볕에 반사되는 색감이 이채롭듯 우리 인간들 역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들을 낱낱이 보고 알게 되면 없던
혐오감이 드는 것과 같아 차라리 그네들의 삶에 적나라한 모습들을
안 보고, 모른다고 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그 같은 사실에
너그러움으로 대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포괄적 의미에서
얼마든지 포용하고 쉽게 받아 드릴 수 있는 이치 또한 진리인 것을
되지 않는 구변으로 불특정 다수를 사랑함을 그릇되다 함엔
저들의 가슴에 앙당그린 흉측한 음모, 즉 저 자신들의 삶을
이상인 것처럼 포장하여 지금에 자신들의 입지를 고착시켜
http://cafe.naver.com/didsando/2974에 기술한 내용의 일부에서와
같은 “1년 학비 1200만 원 하나 고를 아시나요?”라고 한 기사와
같이 이 땅에 별정 고를 인정하고 대대손손 대물림이라도 하고
싶겠지만, 세상만만사가 그러하듯 치부를 가리고 숨긴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할 수없는 이치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과 같아
종국에는 허물을 들어내게 마련인지라 이즈음 우리 사회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종단의 대표자들이 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느 시대와 달리 지각의 더듬이를 쫑긋
세워 자기중심의 신앙심을 찾아야 할 매우 어려운 시대이다.
신은 이미 아사했지만, 우리 인류의 사고는 진화하게 마련이다.
모름지기 남들보다 차별화된 기업인이 되고 싶거든
사람들의 가치를 신선한 과실에 가치를 인정하듯 사람이
자질로서 주어지는 행보에 사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봐 줘라.
나는 每日, 오늘도 下記같이
나 梁 鍾 植은 大韓民國 大統領으로
世界를 完全히 平定하고
人類를 宇宙에 스승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고 念願을 담고, 또 주어 담으며, 呪文처럼 뇌까린다.
-=략=-(2011.08.10.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