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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과 '숭례문', 그리고 '대운하'

<기고>"이명박은 <조선왕조실록> 읽어라"

#1. "진짜 황당하다. 한 사람 때문에 숭례문이…"

요즈음 시청.광화문을 지나는 시내 버스 안에서나 시청을 중심으로 한 앞뒤 좌우 거리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숭례문(또는 남대문, 이하 숭례문으로 표기) 화재 사건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숭례문은 조선 왕조 이래, 600백년 수도 서울의 중심 한 가운데에 있는 상징건물(랜드마크)이다. 대한민국 수도의 역사적 문화적 대표 상징 문화재가 방화로 의한 대화재로 전소된 전대미문의 사건에 언론매체에서 하루 종일 숭례문 대화재 사건을 보도하는 일은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

대사건이 발생하면 언론사와 기자들은 고단하지만 즐겁다(?). 하지만 이번 숭례문 방화사건은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과 정신에 외과적 수술로는 절대 치유하기 어려운 큰 구멍을 만들어냈다. 먼저 언론에게 주문하고 싶다. 숭례문 화재사건은 한마디로 처방이 간단치 않은 대사건이기에 언론은 이 사건을 대단히 섬세하면서도 장기적 안목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

단언컨대 이번 화재 사건을 둘러싼 핵심은 절대 국보1호 문화재의 손실과 성공적인 복원 문제만이 아니다. 이번 대사건의 성격 규정은 '방화에 의한 국보1호 전소 사건'이라고 단정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언정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마디로 형언하기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지만 숭례문 화재 사건은 우리 시대에 근원적인 화두를 던져준, 정부 수립 이후 사회 문화사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대사건으로 기록되기 충분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자명하다. 숭례문 사건의 역사적 교훈과 과제를 잘 새김으로써 국민의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그럼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분명히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옛 기록을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록에 근거한 역사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봄은 필요하다. 과거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숭례문 운하 건설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2. "백성이 어려우니 숭례문 운하는 중단하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 태종 26권, 13년 7월 20일 2번째 실록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95년전인 1413년(계사년) 7월 20일, 즉 태종(이방원) 13년(명 영락 11년) 때의 일이다. 어전에서 운하 건설을 둘러싼 왕과 조정중신들의 회의가 열렸다.

'좌정승 하윤 등이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팔 것을 청하나 (왕은) 윤허하지 아니한다.' 이날 실록의 골자다. 6백여 년 전, 숭례문 운하 건설이 추진되었다니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럼 태종 이방원은 왜 운하 건설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날 현장으로 가 보자.

의정부 좌정승 하윤(河崙) 등이 운하[渠]를 팔 것을 청하였다. 계청(啓請)은 이러하였다.

“마땅히 경기의 군인 1만 명, 경중(京中)의 대장(隊長)·대부(隊副) 4백 명, 군기감(軍器監)의 별군(別軍) 6백 명, 모두 1만 1천 명을 징발하여 양어지(養魚池)를 파고, 숭례문(崇禮門)밖에 운하를 파서 주즙(舟楫 : 배) 을 통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땅은 모두 사석(沙石)이므로 물이 머물러 있지 않으니, 중국의 운하를 판 것을 본받을 수는 없다. 명일 내가 장차 면전에서 의논하겠다.”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정부에 일렀다.

“숭례문(崇禮門)에서 용산강(龍山江)에 이르기까지 운하를 파서 주즙(舟楫)을 통행하게 한다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모래 땅이므로 물이 항상 차지 못할까 의심스럽다.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가합니다.”

하였으나, 오로지 의정부 찬성사 유양(柳亮)만이,

“용산강은 도성(都城)에 가까운데 어찌 반드시 백성들을 괴롭히겠습니까?”

하였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자청(朴子靑)이,

“땅은 모두 수전(水田)이니 반드시 새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착(開鑿)의 공력은 1만명의 한 달 일을 넘지 않으니, 청컨대, 시험하여 보소서.”

하였다. 임금이 깊은 인력(人力)을 쓰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일을 정지하고 거행하지는 않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좌정승 하윤 등이 군인 등 1만 1천명을 징발해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배를 통행하게 하는 운하를 만들자고 태종에게 건의했지만, 태종은 모래 땅이라 물이 차지 못할 것, 둘째 중국의 운하를 판 것을 본 받을 수 없고, 백성이 어려운 지경이고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된다며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거부하였다. 비록 600년의 시차는 있지만 이명박 새 정부의 경부 대운하 강행과 비교해 볼 때 재미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날 자 실록 원문의 마지막 대목, '上深知用力之難, 故事寢不擧'을 국문본(국가기록원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국역본)에는 '임금이 깊은 인력(人力)을 쓰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일을 정지하고 거행하지는 않았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국문본 중 '깊은 인력을 쓰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원문의 '深知用力之難'는 '백성의 노력을 동원하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므로) 어려운 일임을 "잘(깊이있게) 알고(헤아리고) 있기에(深知)"로 번역해야 한다. 고사에 잘 등장하는 '深知(심지)'란 한자어는 우리 말로 해석하면 '깊이 있게 안다. 잘 안다. 깊이 헤아린다.'로 풀이해야 한다. 한마디로 천박하게 알고 있지 않고, 사물과 국면을 깊이 있게 꿰뚫어본다는 말이다.

현재로 돌아오자. 2008년 2월 10일 밤 숭례문 화재사건이 나자, 다음날 방문한 이명박 당선자는 '사회 혼란'을 우려했고, '국민성금'을 지시한다. 일부 대기업 등이 즉각 호응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허탈 속에서도 '지금이 전두환 때냐', '화재 원인을 먼저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며 분노한 민심이 들끓었다.

그렇다. 당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민의 상처 난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국민성금 운운은 한참이나 앞서간 발언이었다. 주도면밀하지 못한 숭례문 개방과 이후 방재대책이 이번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렇다면 당선자는 자신이 주도했던 숭례문 개방의 문제점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했어야 한다. 백성의 마음을 '심지(深知)'하지 못한 당선자의 '사회혼란', '국민성금'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 원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혼란'의 책임은 나라와 서울시에 있는 것 아닌가.

국정최고 책임자는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情心(정심: 자세하고 깊이가 있음)'해야 한다. 얄팍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근본으로 삼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고, 국민의 아픔과 어려움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아닌가.

#3. 당선자와 새 정부는 애민(愛民)사상 따라야

다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으로 가 보자.

태종 30권, 15년(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7월 17일(임자) 1번째 기사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숭례문 안의 행랑 등이 무너져 다시 고쳐 짓게 하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화곡(禾穀)이 쓸리고 나무가 뽑히고, 숭례문(崇禮門) 안의 행랑(行廊) 13영(楹)과 흥복사(興福寺) 문 남쪽 행랑 15영과 내사복(內司僕) 문 3영이 무너졌다. 임금이 감역 제조(監役提調) 병조 판서 박신(朴信)에게 이르기를,

“행랑이 기울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짓기를 단단하게 하지 못한 까닭이다. 일을 위임하였는데 마음을 다하지 않았으니 가한가?”

하니, 박신이 부끄러워서 사과하였다. 안성 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이조 판서 박은(朴&#35348;) 등이,

“나무 깎은 것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모나고 둥근 것이 맞지 않아서 장차 다 무너질 형세이니, 고쳐 지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박신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다. 임금이 탄식하기를,

“지난해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지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찌 구원(久遠)한 계책이겠는가? 또 지금 다시 짓자면 어떤 사람을 역사시킬 것인가?”

하고, 명하여 그때의 감역관, 전 부정(副正) 송진생(宋辰生)·전 부사직(副司直) 조복초(趙復初)·전 주부(注簿) 김관(金灌)과 대장(大匠) 덕해(德海)를 가두었다가 3일 만에 석방시켜서 그대로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병조 판서 박신(朴信)·전 이조 판서 황희(黃喜)를 행랑 도감 제조로 삼아 행랑을 고쳐 짓게 하였다. 그 군인은 화통군(火&#15809;軍) 4백 명, 사재감(司宰監) 수군 1백 명, 의금부의 번상(番上)한 도부외(都府外)3438) 50명과 보충군(補充軍) 50명과 선공감(繕工監)의 목수(木手)·석수(石手)·노야장(爐冶匠) 등의 사람이었고, 사령(使令)은 출번(出番)한 근장(近仗)으로 충당하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태풍으로 숭례문 행랑(行廊: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등이 무너지자 태종은 그 책임이 부실한 공사에 있음을 간파하고, 책임자 처벌을 지시한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지었는데, 다시 짓자면 또 백성을 고생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의 문책은 엄중했다. 숭례문 행랑 역사의 책임자를 옥에 가둔 다음 석방시켜 다시금 공사를 진행하게 했다. 이 일에 6백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됐다.

태종이 엄정 문책을 지시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조선 건국 초기 도성과 4대문, 왕궁과 이를 연결해 지어진 행랑간 공사에는 막대한 백성의 인력과 재화가 투입됐다. 쉽게 말해 백성들이 뺑이치면서 강제노역에 동원돼 만든 것이다.

세종실록의 기록도 살펴보자.

세종 117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8월 30일(기축) 2번째 기사다. '좌참찬 정분 등에게 숭례문의 신축을 감독하게 하다'

숭례문(崇禮門)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左參贊) 정분(鄭&#33519;)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33519;)이 오로지 토목(土木)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營繕)하는 일이 연해 계속되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요약하면 세종대왕이 명한 1447년 숭례문 신축 공사에 막대한 재물과 인력이 투입됐다는 얘기다. 신축공사는 혹독하게 진행한 것으로 나온다.

세종 118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11월 12일(신축) 1번째 기사를 보자. '사헌부에서 추위로 숭례문의 역사 정지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때가 바야흐로 추워서 얼음이 얼으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합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정지하고자 하나, 다만 두렵건대 개춘(開春)이 되면 질역(疾疫)이 성행할 것이므로 감히 못한다. 장차 정부(政府)에 의논하겠다.” 하였다.


동절기가 다가오자 숭례문 신축공사를 중단하자고 사헌부가 건의했지만, 세종은 이를 물리친다. 추위에 동원된 백성의 고생을 왕이 모를리 없건만, 춘궁기인 봄에는 백성을 동원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므로 유행병(질역)을 들어 거부한 것이다. 이처럼 숭례문은 백성의 피땀으로 건설된 문화재이다.

지리지 <경도 한성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태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 도성을 축조하는 데 무려 54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태종실록 기록(13년 5월 16일)에 의하면 숭례문 등이 포함된 도성의 장행랑은 종루로부터 경복궁, 창덕궁과 종묘 앞 누문, 숭례문 전후에 이르렀는데 좌우 행량이 1,360간이며 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2,641명에 달했다.

서울시 기록에 따르면 세종 10년인 1428년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다고 전한다. 대부분 왕실과 양반 관료, 군사, 관노비와 사노비, 공장.상인들이었다. 성 밖의 인구까지 더하면 수도 한양의 인구는 11만명에 달한 셈이라고 한다.(민병준의 향토기행 서울1 중심부 참고)

성곽과 4대문, 행랑 등 통칭해 도성을 쌓는 대역사에 연인원 54만명이 넘는 백성이 동원된 것이다. 당시 한양 인구의 5배이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서울시 인구 1천만명의 다섯배인 5천만명을 공사에 동원한 셈이다. 우리 조상들의 상당수가 도성, 숭례문 등의 대역사에 강제로 동원된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왕자의 난)한 태종 이방원은 초창기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취약한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허구한 날, 노가다에 백성을 동원했으니 군주의 마음이 편할 할 리 없었다. 백성들의 어려움이 가중됐고 원성이 늘자, 세종 때에는 사헌부가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는 일도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의 숭례문 사례에서 드러나는 태종의 애민 사상은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음에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 군주라 함은 모든 통치행위의 근본을 '애민'에 두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다.

숭례문 행랑의 용도를 놓고 세종과 호조 판서 신호가 벌인 논쟁 일화를 소개한다. 세종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7월 27일의 일이다.

호조 판서 신호(申浩)가 창고의 미두(米豆)가 남는 것을 수장할 곳이 없으니, 숭례문(崇禮門) 안의 행랑(行郞)에 간수하기를 임금에게 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만약 행랑을 빼앗아서 곡식을 간수한다면, 거기에 사는 백성들은 장차 어디고 가겠는가. ”라고 하니, 신호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세종에겐 백성의 민생이 먼저였던 것이다.

6백년 뒤 숭례문 화재 사건은 어떠한가? 아직 관료 누구 하나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복구 책임은 '국민성금으로 짓자'며 국민에게 떠 넘기고 있다. 개탄스런 일이다.

#4. 참다운 복원은 숭례문 화재의 교훈과 역사적 가치를 찾는 일

숭례문 대화재는 이 시대의 모순과 과제를 드러낸 시대적 화두이자 역사적 사건이다. 역사적 기록에서 드러나듯 숭례문의 진정한 주인은 당대와 현재의 민중들이다. 숭례문 개방을 주도했던 이명박 당선자나 문화재청 등 정부가 주인일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나서 '국민성금' 운운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특히 '盧탓, 李탓'으로 번진 정치권의 책임소재 관할권 싸움은 기가 찰 노릇이다. 정치권은 지난번 이천 물류창고 참사 때에도 '노무현 대통령 탓이니, 아니니' 관할권 다툼을 벌였다.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은 새 정부의 출범에 악재가 될까봐 노무현 정부 책임으로 돌렸다. 그에 맞서 통합신당은 숭례문에 불이 나자, '이명박 서울시장이 숭례문을 졸속으로 개방해 화를 불렀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가관이다.

손사래를 치는 승객을 뒤로 하고 이미 떠나가는 버스에다 욕을 해 봤자 소용없듯 임기가 끝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책임전가는 해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숭례문 개방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비판도 문제가 있다. 솔직히 숭례문 개방 자체야 잘 한 일 아닌가? 문제는 개방에 따른 관리대책이 부실하고 형편없었기 때문에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화려한 개방 행사와 언론을 향해 손 한번 흔들어주는 등 공적, 치적으로 포장해 놓고, 뒷감당을 지지 않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행태가 문제이지, 이미 엎질러진 '숭례문 개방'을 자꾸 문제 삼아서는 능사가 아니다.

현 정부나 새 정부, 서울시 모두 책임이 있다. 누구라고 굳이 지칭하고 싶지 않다. 숭례문 화재 사건에 대한 통절한 책임과 국민에 대한 사죄가 필요하다. 정치권은 즉시 대책 없는 정략적 공방을 멈춰야 한다. 언제까지 관할권 다툼이나 벌이는 후진 정치를 할 것인가? 숭례문과 국민을 두 번 죽 일 셈인가?

#5.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처방이 있다… ‘바람은 속이 빈 배를 뒤집지는 못한다’

이번 숭례문 화재 사건은 토지 보상금에 불만을 품은 70대 국민의 소행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국보 문화재에 대한 방화도 문제지만 이는 국민을 향한 정신적 테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혐의자가 숭례문을 방화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한마디로 민원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에 대한 원한이 쌓여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저지른 셈이다.

숭례문 화재 사건이 나자, 한 누리꾼에 의해 2007년 초에 문화부에 노숙자에 의한 숭례문 방화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비할 것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탁견이다. 그러나 '노숙자'를 숭례문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통칭해 지목한 것이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이후 남대문 근처의 노숙자들이 자주 숭례문에 들어가 가스버너 등을 이용해 라면도 끓여먹고 이용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2월 13일자 사설 '숭례문에서 노숙자들이 라면 끓여 먹었다니'를 통해서 노숙자들을 힐난했다. 필자는 일부 노숙자들의 행위를 비호하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 그러나 오죽했으면 노숙자들이 남대문을 이용(?)했겠는가? 우리 사회의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최하층민들이 바로 노숙자들이다.

노숙자들의 개인사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를 돌보고 구제할 책임은 국가와 사회에 있다. 이들을 범죄자로 몰아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지만 노숙자들은 숭례문을 방화하지 않았으며, 사회가 버린 이들을 따뜻하게 포용한 것은 바로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이 노숙자들의 임시 거처로 전락해서는 안 되지만 오갈 데 없는 노숙자들을 잠시라고 품은 것은 숭례문의 넉넉함과 온기였다. 그 점만 말하고 싶다. 노숙자들에게 화장실조차 내어주지 않는 게 이 사회의 모습이다.

당대의 명문장가인 백락천의 '감흥(感興)'이란 싯귀가 있다.

'吉凶禍福有來由, 但要深知不要憂&nbsp;&nbsp; 只見火光燒潤屋&nbsp;&nbsp;不聞風浪覆虛舟.'

길흉화복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원인을 알되 결과를 두려워 말라. 불이 나서 큰 집을 태우기는 하여도 바람은 속이 빈 배를 뒤집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만물사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원인을 바로 알면 결과에 대비할 수 있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원인을 안다면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숭례문 방화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빚어낸 비극적 참화다. 있어서도 안 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참화의 원인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책을 제대로 내와야 한다.

그런데 숭례문 화재 사건에 대한 섣부른 잘못된 진단과 처방이 현재 시행되고 있다. 방화 혐의자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 사회가 자문해 봐야 한다. 불이 나자마자, 노숙자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아님이 밝혀졌다.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고자 함은 숭례문 화재 사건이 주는 교훈이 아니다. 이는 당대와 현 시대 민중의 피와 땀이 깃든 숭례문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품고, 나라는 백성의 아픔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공직자가 잘못했다면 권력책임자가 나서서 그들을 일벌백계해야 한다. 또한 국정책임자의 잘못이 있다면 국민에게 솔직히 사과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숭례문 방화 사건에는 이러한 바를 찾을 수 없다.

그 옛날 숭례문이 만들어지던 조선 시대 당대로 돌아가보자. 통치자들이 어떻게 도성을 쌓고 숭례문 등 4대문을 축조했는지, 당대의 얼마나 많은 민중이 그 노역에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렸는지 살펴보자. 자신을 태우면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 숭례문은 불타버린 우리의 초상이다. 권력자는 자만하지 말아야 하며 백성의 아픔과 어려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백성 사랑이 먼저다. 동시대인들은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의 가려운 곳, 아픈 곳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법을 찾을 수 있고, 두 번 다시는 숭례문을 불사르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6. <조선왕조실록>의 숭례문(남대문) 기록

숭례문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5백여 편에 달하는 각종 기록은 숭례문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삼을 수 있다. 실록에는 숭례문에 종을 매달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숭례문 앞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숭례문에서 청계천까지 노등(路燈)을 달았다는 기록도 있다. 숭례문 대문에 낙서가 횡행해 수문장 등을 징계하고, 낙서자들을 현장에서 체포해 힐문해야 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숭례문은 예나 지금이나 관리하기 쉽지 않은 국가 중요 시설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조선 시대 숭례문과 주위의 건물, 시설물의 원형을 유추, 복원해 낸 다음, 이를 근거로 현재 방화로 불타버린 숭례문의 복원 방향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숭례문 좌우 성곽을 다시 지을 수야 없는 일이지만, 조선 시대 당시의 숭례문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문화재청, 국가기록원 등 정부관계기관, 서울시, 역사학자, 문화재전문가, 언론, 나라와 국민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따라서 숭례문 누각만을 중심으로 한 섣부른 복원은 금물이다. 불에 탄 숭례문 부자재 등을 폐기처분하다 여론의 질타를 받은 문화재청의 행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조선왕조실록>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숭례문에 관한 역사적 기록 등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필자는 <조선왕조실록> 디지털 DB를 샅샅이 검색해 숭례문에 관한 모든 기록을 모으고, 분석해 숭례문의 원형 조감도를 구성해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준희 인기협 회장 ⓒ뷰스앤뉴스
이준희 인터넷기자협회장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정말

    대단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엊그제 저도 불탄 숭례문 현장에 다녀왔는데 TV로만 보다가 직접 현장을 가보니 정말 가슴이 짠하더군요.., 옆에선 장송곡이 울려대고 .., 갑자기 청계천 효과와 숭례문 참사 어느 것이 더 국민들에게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이런 정치적 생각도 들고 ...숭례문 복원 현장 가림막에 조그맣게 난 네모난 구멍 앞에서 어느 젊은 여성이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큰 절을 하는데 그 모습 보니까 가슴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분노가 팍 솟구쳐 오르고 .... 현장 접근이 많이 불편하던데 그래도 끊이지 않는 국민적 애도의 발길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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