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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뿌리세요 → 대살굿 따라하세요

던져라
조회: 187

[ ..... 소금 뿌리세요 → 대살굿 따라하세요 .......

굿판에 어울리는 추임새, 박수 오열 빙의 등 다양한 리액션이 허용된다. ....... ]

소금 뿌리세요 → 대살굿 따라하세요… '파묘', 각양각색 상영회 릴레이 [이슈S]

2024.03.15

강효진 기자

[스포티비뉴스=강효진 기자] 영화 '파묘'가 천만까지 약 158만 관객을 남겨둔 가운데 다채로운 콘셉트의 상영회 콘텐츠로 화력을 더하고 있다.

'파묘'(감독 장재현)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하는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 영화다.

지난달 22일 개봉 후 841만 관객을 동원하며 천만 관객을 바라보는 가운데, '파묘'의 흥행세에 화력을 더하는 각양각색 릴레이 상영회가 눈길을 끈다.

'파묘' 배급사인 쇼박스는 '파묘' 팬들의 유쾌한 관람을 돕기 위해 다양한 상영회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달에 이어 지난 9일에는 '손 없는 날'을 맞이해 미드나잇 상영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액운을 퇴치하는 소금을 선물로 증정했다. "상영관을 나오며 소금을 온 몸에 뿌려주세요"라며 영화 속 장면을 재연하게 만드는 센스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오는 24일에는 '용기천만 상영회'라는 타이틀로 소리차단 이어플러그와 축경 타투 스티커를 증정하는 상영회를 개최한다. 영화에 비중있게 등장하는 축경 타투를 따라할 수 있는 타투 스티커로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다.

더불어 오는 30일에는 노래를 따라부르는 싱어롱을 잇는 '굿어롱' 상영회를 개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바세계 남섬부주 해동조선 대한민국. 굿판 한 번 벌여보자!

'파묘' 굿어롱 상영회 확정. 화림의 혼부르기 경문 & 봉길의 대살굿 경문 함께 따라 부르며 험한 것 쫓아내자"며 개최된 '굿어롱' 상영회에 많은 '파묘' 팬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자유롭게 경문 따라부르기, 굿판에 어울리는 추임새, 박수 오열 빙의 등 다양한 리액션이 허용된다. 돼지 띠 관객은 더욱 환영한다는 안내까지 더해져 '파묘' 과몰입 팬들의 열띤 반응을 자아낼 것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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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potv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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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

.....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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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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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들이 김근호씨 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여인의 친정 아버지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빨치산들은 당장 친정 아버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여인의 시댁 식구들 뿐만 아니라 숨겨준 집 식구들까지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때까지 빨치산들의 행태를 보아온 여인은 빨치산들의 위협이 단순한 위협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느 쪽의 죽음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해산기도 가시지 않았던 여인의 선택은 친정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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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산당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잘못 걸리면 온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까. 운이 있으면 살고 운 없으면 죽고, 그 사람들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어』

현재 백수면 길용리에 사는 전계선(62)씨도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밤손님」(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만 10세였다. 당시에도 그는 백수면에 살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전씨는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 보였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한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다.

좌익 스승이 「반동」 제자를 죽이다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한 한참 후의 일이다. 백수 동초등학교에는 金모라는 교사가 있었다. 金교사는 음악을 잘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온 후 金교사는 본색을 드러냈다. 좌익이었던 것이다.

전씨가 동네 어귀 고구마밭 부근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다. 金교사가 한 아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용리에 사는 2학년 아니면 3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였다.

전씨와 함께 놀던 아이들은 金교사가 끌고 오는 아이가 「반동」의 가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씨는 그때 끌려오던 아이의 표정이 어땠는지, 몸짓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전씨가 눈을 떴을 때 金교사는 자신이 끌고 온 아이를 칼로 찌른 후 고구마밭 고랑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전씨는 다리를 후드득 떨었다. 金교사의 목소리가, 6·25 전쟁 前에 학교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토록 멋지게 들렸던 목소리가 귀신의 음성처럼 웅웅 울렸다.

金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칼에 찔려 밭고랑에 처박혀 있는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돌을 들었고 전씨도 돌을 들었다. 전씨는 그때 자신이 들었던 돌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전씨가 던진 돌은 힘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도망을 가면 경찰의 앞잡이로 몰려서 가족들을 죽일 텐데 도망을 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우리 백수면 사람들은 피란을 가면 밤손님들한테 반동으로 몰리고, 피란을 안 가면 경찰들에게 빨치산 앞잡이로 몰리던 상황이었어요.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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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형식적이지만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을 했어요.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죽였어요. 주로 군경 가족들이 희생됐죠.

빨치산들은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죽였어요.

나도 네댓 번 우익 쪽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있었는데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어요. 학살 후 구덩이에 묻기도 했지만 개울에 버린 시체도 많았어요.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구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때는 무덤덤하게 죽이라면 죽였어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백수면에서 우익 인사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최모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칼을 사용했어요.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우익 쪽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날도 최모씨는 칼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칼에 묻은 피를 빨아먹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기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했던 우리들도 전율을 느낄 정도의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빨치산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어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식구가 몽땅 죽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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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명부 발견

靈光 대학살 2만1225명

월간조선 2002.4.

[ .....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 ]

다물칼럼내가 본 6.25 당시의 인민재판

노 희 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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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민군은 산 속으로 숨었을 뿐 철수한 것이 아니었다. 동네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마치 테러 직전의 음산한 기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지만 동네 빨갱이들은 더 기승을 부리고 다녔다. 붉은 완장을 찬 대 여섯 명의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와 온 집을 죽창으로 쑤시며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을러대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또렷하다.

며칠 뒤에는 인민재판을 한답시고 동네 한 가운의 밭으로 다 모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남고 할머니만 갔는데 나는 몰래 따라갔다.

옥수수 밭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인민재판은 다름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말뚝에 묶인 채 서 있는 누군지 모를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나는 무서워 옴짝달싹 못하고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도망쳐왔다. 방 안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숨만 할딱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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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우리 동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밝은 공기가 감돌았다. 인민군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얘기가 한 바퀴 돌고나서야 사람들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서천읍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사람들은 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장에 갔다 온 사람의 말로는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읍내 유지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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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휘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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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놈은 일부러 죽을 자리 찾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옮겨간 지 며칠 안돼서 동네에 두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는 나 다니던 산정국민학교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선생의 시국강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날 그 동네출신 전직 경찰관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동네방죽 옆에 있는 너른 마당에서 박선생 강연이 먼저 열렸다. 한창 더울 때인데도 박선생은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반듯이 차려입고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를 토하듯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영용한…영웅적인…위대한…쓸어버립시다…만세, 만만세…

이런 단어들밖엔 기억이 없다.

그리고는 박수, 또 박수….

인민재판은 끔찍했다. 어린 나에겐 잘 이해 안되는 논고, 동의, 동의의 함성이 지나고 죽창으로 처형을 할 차례인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피고의 얼굴은 백짓장 단계를 지나 송장모냥 시커멨다.

한 사람이 불쑥 앞에 나섰다.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요렇게만 하씨요, 죽창을 저놈 아랫뱃대기에다 요렇게 대놓고 눈을 질끈 감고 기합을 준단 말이씨! 요렇게! 야아아앗!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빼버렸다. 도망가는 내 뒷등어리에 갑자기 솟아난 네 개의 눈동자에는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죽창을 피고의 아랫배에 갖다대고 야아아앗! 기합을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이 선명하게, 붉은 피 번지듯 선명하게 비쳐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인민재판의 실상을 꼭 눈으로 본것처럼 기억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천길 구덩이 속에서 솟아오른 도철의 얼굴들이었다.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다.

나처럼 방상씨(方相氏)의 네 눈이 상상으로 본 것. 그것이 인민재판이다.

그것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다 죽었다. 혼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서도 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산자에 대한 검은 저주였다.

[ .....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 ]

[ .....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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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청소년들이 흔히 그랬듯 이북이 사회주의 낙원이란 선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바뀐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나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 사이에 붉은 깃발까지 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북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도열한 가운데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해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탱크와 따발총을 그때 처음 보았다. 상상도 못해 본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탱크가 마치 양민들의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됐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뜨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그 여름의 혹서는 더욱 잔인하게 달구었고 혹서가 누그러질 무렵 서울 상공은 밤낮없이 미군 폭격기 차지였다. 오폭도 잦아 민가 밀집 지역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교외로 빠져나가던 민간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하강한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를 맞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마 따발총 맞고 죽은 수효보다 기총소사 맞고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행기가 더 자주 뜨기를, 바다 쪽으로부터 들리는 함포사격이 더 치열해지기를 기다리고 거기 희망을 걸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열렬하게 미국의 병력이 이기라고 응원한 것은 따발총보다는 비행기가 더 강해 보이니까 이왕이면 강자 편에 붙으려는 비겁한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정(虐政)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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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기보다는 꽃다운 나이에 6.25를 겪은 우리 세대 대부분의 평범한 노인들 공통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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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20667

[중앙시평] 초여름 망필(妄筆)
[중앙일보] 입력 2005.06.21

박완서 소설가

2017

[ ..... 총살하는 사람의 가족을 맨 앞에 두고,

가족이 제일 먼저 돌로 던지게 하는 거예요. ........ ]

“北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시 가족들 앞줄에서 돌 던지게 해”

By DailyNK - 201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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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대 청춘까지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던 박주용님을 모셔 수용소 내 인권침해 실태, 특히 공개처형과 강제노동 등 생활 실태 등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먼저 공개처형 실태에 관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 박주용씨 안녕하세요. 태어난 곳이 어디시죠

21호 수용소에요. 21호 수용소에서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돼 18호 수용소로 옮겨갔습니다. 삼촌죄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 때 옮겨가 18호 수용소에서 언제까지 사신 건가요

수용소를 탈출하기 직전인 23살까지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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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18호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친척이나 형제, 알지도 못하는 팔촌의 죄 때문에 (연좌제로) 들어와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죠.

– 수용소 내에서 공개처형이 이뤄진다고 하는데요, 박주용씨 직접 보신 적 있나요

그냥 봤다는 정도가 아니고 직접 많이 봤습니다. 공개처형을 한다고 (처형자의) 사진을 걸어 둡니다. 거기에는 (처형자의) 나이, 키 등도 같이 적어 둬요. 여기(한국)은 전봇대 같은 데에 (방을) 붙여놓는데 거기(북한)에선 집 앞(벽)에 붙여 둡니다. 이런 사람을 몇시에, 어디에서 공개처형을 할 것이니 일 나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나오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침 7시에 공개처형 한다면 이 시간에 근무하는 사람 외에는 전부 나와서 보라는 것이죠.

저희 어머니는 어린 저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저희를 숨겨 놓곤 했습니다. (저희를) 방에 두면 인민반장이 돌아다니다 애가 있는걸 알게 되니까 (안되고). 저희 집 마루 밑에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저희를 숨겨뒀어요. 공개총살이 끝나고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는 거죠. (숨어있던 곳은)연탄 냄새가 덜 나서 그때 당시에는 뭐 모를 때라 엄마가 숨어 있으라 하니 숨어있는 거죠. 거기서 나가면 잡혀가고 혼나게 된다는 걸 아니까 숨어 있다가, 엄마 오면 문열어주고 그때서야 나오곤 했어요.

그러다 제가 성장해서 공개총살 현장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9살, 10살 즈음 됐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제일 앞에 앉혀요. 그 다음 순서대로 큰애들을 앉히죠. 버드나무에 나무 갑판 하나 박아 두고 (처형자의) 손을 묶고, 죄목을 알려줍니다. 이 사람 죄는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 (18호 수용소)에서 탈출하려다 직동 처소에서 잡혔는데, 탈출하려고 했다는 걸 인정 안했다고. 그래서 이 사람을 교화소에 보냈는데 교화생활을 하던 중 반성을 안 해, 결국 처형에 처한다고 하더라고요. 장군님 방침에 어긋났으니 처형해도 마땅하다며, 인민의 이름으로 무참히 처형하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고 보고 있던 사람들이 돌을 막 던지고, 당시 장마철이라 강가에 떠내려 온 각목으로 때리기도 하고요.

당시 저에게 처참했죠. 꼭 봐야하나 싶었고요. 또 들었던 생각이 ‘나도 죄를 지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더욱 안타까웠던 게 총살하는 사람의 가족을 맨 앞에 두고, 가족이 제일 먼저 돌로 던지게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돌을 던지기 전에 가족이 먼저 돌을 던지게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장군님의 방침에 어긋나게 행동했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이런걸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거죠. 그렇게 돌로 맞다가 숨만 겨우 붙어있는 때 그제서야 총으로 쏴 죽이는 겁니다.

– 사람들의 반응은 다 달랐겠습니다만, 대체로 어떤 반응인가요

북한에선 항상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요.) 아버지 말씀에 어긋났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한 80~90퍼센트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처럼 (그곳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저희 부모님처럼 바깥 생활을 하다 들어온 사람은 또 다르게 생각했을 거라 봐요.

또 (드는 생각이) 한창 꽃피어날 어린아이인데, 장군님이 말로는 ‘꽃 같은 어린아이’라 하면서 왜 이런 처참한 걸 어린아이가 보게 하는지 싶었고요.

– 또 내가 저 상황이 되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생기고 했군요. 공개처형에 보통 몇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나요

몇 명이라고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일 나가는 사람, 저희 부모님처럼 어린 아이들을 숨겨놓는 경우, 몸이 불편해 걷지 못해서 못 나오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략 천명은 더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로를 꽉 메울 정도로요.

먼저 돌을 던진 사람이 뒤로 오고 그 다음 사람이 또 나와 돌을 던지는 식으로 반복돼요. 한 사람이 공개 처형된다 하면 몇 천 명의 돌을 맞는 거죠. 던지는 사람의 힘에 따라 한번 맞아 살이 뜯겨 나가는 정도가 다르지만. 몸이 (많이 맞아) 부어있기 때문에 뾰족한 돌을 맞는 경우 살에 박혀서 안 나오기도 하고요. 숨만 붙어있는 거라고 봐야 하죠. 그렇게 돌을 맞다 (총을 맞기도 전에) 죽는 경우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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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처형이 일 년에 한번씩 있는 특별한 게 아니고 일상적으로 있는, 한 달에 두세 번씩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군요. 가슴 아픈 이야기이겠습니다만, 그동안 봤던 공개처형 가운데 기억이 나는 사례가 있나요

당시에는 그분이 죽는 게 가슴 아픈 줄 몰랐어요. 공개처형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크게 못 느꼈는데. (그 사람은) 평안북도 구장에서 혁명화로 온 사람이었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학습시키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지내던 사람이었어요. 수용소 바깥 생활을 하다 온 사람이죠. 수용소에 와서 석탄을 캐다가 다리를 다쳐 심하게 절었어요. 그러다 그 사람이 수용소를 탈출하려고 했던 겁니다.

시도를 했는데 중간에 잡힌 거예요. 나가려고 한 거냐 물어봐도 그 사람은 구장에 있는 가족, 친척들이 다칠 것을 생각해 입을 아주 닫았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교화형에 처하게 됐죠. 교화형이라면 수용소 내 가장 심한 처벌에 해당합니다. 1년인가 2년의 형을 받아 갔는데, 갑자기 살이 빠지고 영양실조에 걸린 거죠. 어느 날 그 사람을 공개처형을 한다고 내걸었더라고요.

교화형 2년인가 형을 받은 사람인데 왜 벌써 공개처형을 하지 싶었어요. 현장에 나가서 그 사람을 보니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같은 직장에 나가며 보던 사람이기 때문에 알고 있던 사람이었거든요. 부모, 형제 나오라는데 가족도 없고. 그래서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보고 나오라해서 제일 먼저 돌을 던지게 하고, 그 다음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돌을 던지게 했죠.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 이 사람을 동정한다 하여 감정 실지 않고 돌을 던지면 너희도 같이 총살하겠다며 엄포를 놓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주 심하게 돌을 던졌죠.

한번 맞을 때마다 살이 터져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살점이 다 떨어져 나와 뼈가 보일 정도가 됐어요. 결국 그 사람은 총도 맞을 필요 없이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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