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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호치민
조회: 501

전화 속의 생지옥…월남

[중앙일보] 1975.03.31

월남 제2의 대도시며 북부 지역 최대의 군사 기지인 「다낭」이 공산군에 함락된 최후의 날인 29일 「다낭」 시내는 약탈과 동족 살륙의 생지옥을 연출했으며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었다. <사이공=외신 종합>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수송기 타려다 밟혀 죽고…| 바퀴 상자 속에 7명 탑승…기체에 매달려가다 추락도 | 약탈 성행…군단사령관·공군사단장 실종

28일 밤부터 29일 새벽에 걸쳐 공산군의 총 공격 전주곡으로 일제 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날이 새고 시 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공항에는 수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다낭」의 공항으로 밀어닥친 필사적인 난민 군중 속에선 오직 재빠르고 힘세고 가장 비겁한 수단을 지닌 자만이 최후의 난민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기상에 오르려고 아귀다툼하다가 밟혀 죽었고 7명은 바퀴 상자 속에 들어갔으며 간신히 기체에 매달렸던 사람들도 수백m의 고공에서 비행기의 기대를 움켜쥐었던 손의 힘이 빠지자 해상으로 떨어져 낙엽처럼 사라졌다.

<해상 수송 작전 무위>

「다낭」시 함락 최후의 날인 29일 피난민 공수 작전은 비행기의 부족과 피난민의 폭동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해상 수송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국제 개발처 (AID)는 한번에 1천7백명을 철수시킬 수 있는 「점보·제트」 수송기들을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월드·에어웨이즈」 항공 사장 전용기「보잉」 727 항공기 1대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이 항공기가 착륙하자마자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으며 일부만을 태우고 수많은 난민들을 남겨놓은 채 떠나고 말았다.

<50여명이 밟혀 죽어>

「사이공」으로 피난 온 익명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인은 피난 비행기에 몰려든 인파 속에 항공기계단위에서 밟혀 죽은 사람은 약 50명이나 되며 그 중에는 손에 어린이를 안고 임신까지 한 부인도 끼여있었다고 말했다.

피난 비행기에 채 타지 못한 군복 차림의 한 월남군 대위는 군복을 갈기갈기 찢고 적에 가담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피난민 후송 작전을 담당했던 한 미국 수송기 조종사는 월남군 병사까지 서로 비행기를 타려고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고 전했다.
또 4백명의 정부군이 민간인들을 제쳐놓고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했다.

<먼저 타려 총격전도>

이 수송기에 타지 못한 정부군 낙오병들은 비행기를 향해 발포했으며 수류탄 1발이 주익 밑에서 폭발했다. 조종사는 멀리서 「로키트」 포성이 다가오는 가운데 수송기를 급히 이륙시켰는데 「리엔·후옹」 UPI 사진 기자는 기체에 매달렸던 난민이 고공에서 남지나 해상으로 추락하는 참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다낭」 공항에서 한 정부군 병사가 던진 수류탄으로 한쪽 날개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바퀴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조종사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태우려고 민간인들이 몰린 곳으로 비행기를 끌고 가려했으나 어느 곳에나 군인들이 몰려들어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몇몇 군인들은 기관총과 권총을 쏘아댔으나 비행기에는 총알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며 일부는 무기를 내던진 채, 그리고 일부는 수류탄과 기타 무기를 가진 채 비행기로 뛰어들어 왔다.

<정부군 수만명 투항>

월남 정부는 29일 「다낭」시에서 8명의 범법자를 현장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으나 정부의 이 같은 강경책도 무법천지화한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베트콩」 성명은 「다낭」 시내에 갇혔던 수만명의 월남 정부군은 무기를 버리고 「베트콩」에 투항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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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도 최대 불안>

「다낭」 함락이란 비보가 전해진 30일의 「사이공」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했다.
이날이 부활절이라는 사실 외에 「사이공」 시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공포나 불안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군의 남하가 계속되는 한 이곳에도 미구에 전쟁의 공포가 밀어닥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은 시민들의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국민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한 약 5천명의 「사이공」시민들은 29일 「사이공」시내에서 월맹과 「베트콩」의 무력 공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월남 국기를 흔들며 월맹과 「베트콩」의 「파리」 협정 위반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이 월남에 적절한 전투수단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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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2742

난민에 무차별사격

[중앙일보] 1975.04.01

한편 월남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구 왕도 「우에」시로부터 탈주해온 한 경찰관은 31일 5명의 고위경찰관과 아직도 피 교육중인 1명의 경찰간부 후보생이 경찰서 앞에서 공개처형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다낭」시로 가는 어선을 타려고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해안선을 따라 수천 구의 군인 및 민간인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경찰간부 공개처형 | 「후에」시 점령한 공산군

「다낭」시에 입성한 공산군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으며 그가 탄 연락선은 「모터」가 불붙은 속에서도 무사히 소개선에 도착. 소개선 편으로 지난달 30일 「사이공」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했다. .

「사이공」의 명운

[중앙일보] 1975.04.02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바로 같은 날 「사이공」의 주 방어선인 「나트랑」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2일 전에는 「다낭」이 함락되었다. 「사이공」은 완전히 풍전의 등화처럼 시각을 다툴 만큼 명운이 급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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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티우」대통령에게는 꿈결같기만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된 것은 73년 1월 27일.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월남군의 전력이 그토록이나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가 완전히 「스탬피드」현상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월남의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 난중으로 변했고, 지휘관들은 탈출에만 능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군중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나보다.

이를 또 공산 측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도 같다. 공산 측에서는 점령지구 주민들을 자기네 편에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부측에 피난시켰다.

이리하여 생긴 1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은 정부의 행정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산 측은 「크메르」에서도 이런 전술을 썼다. 그리고 일견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도인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은 2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식량보급에 실패한 것이 「론·놀」정부를 자멸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월남 수도는 미군의 출동만이 유일한 구제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대 출동권을 크게 제한 받고 있는 「포드」 대통령으로서는 월남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협상의 마지막 기회도 이제는 잃은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 「사이공」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공산 측은 「티우」정권의 내부 붕괴를 기다리는 재미(?)만이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https://news.joins.com/article/1402895

사이공 최후의 목격자 | 한국인 74명 「괌」 도착

[중앙일보] 1975.05.06

월남 최후의 날 「사이공」을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74명(확인된 사람) 은 기아와 폭서 속에서 남지나해의 거센 풍랑을 뚫고 6일만의 긴 항해 끝에 「필리핀」의 「수빅」만에 도착했다가 비행기편으로 5일 「괌」도에 도착, 급조된 수용소에 입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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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주월 대사 등 공관 직원들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날인 29일 상오 10시 미 대사관으로부터 즉시 철수할 것을 연락 받고 집결지 미군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아파트」 경비병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김 대사를 비롯한 이들은 할 수 없이 다시 제2집결지인 미 대사관 「게이트」 25로 뛰어야 했다. 미 대사관 주변은 탈출하려는 인파로 들끓어 철수 난민이 들어설 틈도 없을 만큼 탈출자들이 숲을 이루었다.

<집결지에 못 들어가>

김 대사와 이상훈 참사관은 대사관 본관으로 들어가 보니 해군 연락 장교 이문학 해군 중령(38) 등이 이곳에서 철수 「헬」기를 기다렸다.
미 해병대 경비병들은 개미떼처럼 밀려 닥친 월남인과 외국인들에게 질서를 잡기 위해 공포를 쏘아 댔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이 중령 일행은 침착히 「헬」기를 기다렸고 「게이트」 25에 들어서지 못한 한국인 40여 명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탈출의 길을 찾으려고 아우성쳤다.

<공포쯤엔 막무가내>

이들이 김 대사의 주선으로 미 대사관 안으로 들어온 후 30일 상오4시쯤 미 「치누크」 「헬」기가 닿아 미 대사관에서 철수가 시작됐다.

질서 있는 철수가 있을 수 없다. 저마다 먼저 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이따금 미 해병대 경비병들이 공포를 쏘며 질서 유지에 안간힘을 썼으나 막무가내며 미 대사관 뒤뜰은 혼란 그것이었다.

이 중령은 자신이 어떻게 「헬」기 안에 들어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라고 말했다. 필사의 탈출에 몸부림치는 인파에 저절로 밀려 「헬」기를 탄 자신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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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405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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