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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정비사의 '의문투성이 죽음'

<현장> 유족 104일째 절규 “사측이 타살을 자살로 조작”

한 노동자가 30m 높이의 격납고 앞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에게는 임신 8개월 된 부인과 7살 딸, 그리고 팔순이 넘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죽음 직전에 둘째가 태어나면 일본 여행을 가자며 여권을 새로 갱신하기도 했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유족들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지만 회사와 경찰은 서둘러 장례를 권고했다. 부검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단순 자살사로 3일 만에 수사를 종결하며 초동수사를 놓쳤고 회사는 자료공개를 거부했다. 결국 한 노동자의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은 자살과 타살이라는 지루한 ‘진실 공방’으로 접어들었다.

만삭 아내와 7살 딸 둔 최광진 과장의 의문의 자살

지난 7월 10일 대한항공 김해정비공장에서 사망한 고 최광진 기체정비팀 과장의 이야기다. 그의 죽음 이후 정확히 1백4일이 지났지만 죽음의 진실을 놓고 사태는 격화하고 있다.

최 과장의 부인 정은영씨는 임신 8개월의 만삭의 몸을 이끌고 40일간 김해공항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 병원으로 후송됐고 동생 정성영씨가 1백일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단순 자살로 종결짓기에는 최 과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너무 많아서다.

8일 부산 지역 3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한항공 고 최광진 과장 의문죽음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와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공공운수노동조합연맹 소속 조합원들은 김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거듭 최 과장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들은 “최 과장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아직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항공은 사내에서 발생한 의문의 죽음의 실상을 덮어두고 위장하기에 급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한 “의문사에 대해서 한 점 의혹 없이 수사해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색출 처벌해야 할 경찰과 검찰은 대한항공과 한 통속이 되어서 이 사건을 자살사건을 몰아가고 있다”며 타살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부산지역 3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고 최광진 과장 의문죽음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8일 김포공항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104일째 미궁에 빠진 의문사의 진실규명을 촉구했다.ⓒ최병성 기자


자살과 타살, 엇갈리는 의혹들

유족들이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최 과장이 자살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유족들과 주변 지인들에 따르면 최 과장은 84세 노부를 모시는 효자였으며 7년 만에 얻게 될 둘째의 출산을 한 달여 남겨두고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회사에서도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과장을 단 장래가 촉망되는 일벌레였으며 그의 유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일에도 그는 새벽 4시에 출근, 납품 기한에 맞춰 항공기를 이상 없이 출고했다. 대한항공 측 또한 그를 “성실하고 능동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인의 처남 정성영씨는 “불과 이틀 전에도 얼굴을 맞대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매형은 평소 처가의 식구들까지 꼼꼼히 챙기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이 가장 강하게 타살의혹을 갖는 대목은 사건조작 여부다. 경찰이 당시 최 과장의 사인을 ‘추락으로 인한 전신상해’라며 자살로 단정 지은 결정적 이유는 고인이 떨어진 것을 목격한 증인의 증언이었다. 격납고 지붕 위에 고인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던 점도 경찰의 판단에 주요하게 작용했다.

유족들 “경찰 초동수사 미흡, 대한항공 증거 조작으로 사인조차 못 밝혀”

그러나 유족과 대책위는 “시신의 위치, 유품, 목격자 진술이 자살이라고 볼 수 없는데도 사측에 의해 조작된 정황이 있다”며 “경찰이 초동수사 미흡과 대한항공의 증거 조작이 맞물려 사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반발하고 있다.

실제 경찰이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밝힌 최 과장의 죽은 시간은 12시 26분. 대한항공 4천5백명의 직원들이 붐비는 점심시간대(11시30분~12시30분)와 일치한다. 그런데도 목격자는 협력업체 직원 단 한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목격자는 최초의 목격 시간을 당시 핸드폰 통화시간을 토대로 정확히 12시 27분이라고 말했지만 대책위는 12시 20분께 누워있는 시신을 본 직원 두 명의 증언을 확보했다. 유족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목격자와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목격자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고 못 만나겠다는 문자만 보냈다.

대책위는 “최초 목격자인 협력업체 직원은 유족측이 경찰에 목격자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8월 말 진술을 번복했다”며 “12시 20분에 시신을 봤다는 또 다른 증언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사망사건은 분명히 조작되고 타살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최 과장이 추락사한 것으로 경찰이 결론내린 김해공항 격납고.ⓒ고 최광진 과장 의문사 대책위


대한항공, 유족들 자료제출 요구 모두 거부

세 번째 의문은 이 대목에서 유족들의 진상규명 노력을 외면한 대한항공의 일관된 태도로 이어진다. 대한항공 측의 사건 조작 은폐 의혹이다. 유족과 대책위는 사건 발생 이후 자살로 볼 수 없는 정황들이 드러나자 사진, CCTV 등 관련 자료 일체를 요구했지만 대한항공은 당시 자료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한달 뒤 경찰에게 시간과 날짜를 삭제한 20여장의 사진을 제출했다. 유족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 어렵게 공개된 사진은 유족들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대책위가 사진을 판독한 결과 대한항공은 경찰에 보고한 현장 도착 시간보다 앞서 격납고 지붕에 올라가 최 과장의 신발을 찍는 등 이미 촬영을 시작한 것이 드러난 것.

실제 유족이 공개한 사진에서 최 과장의 시신은 30m 높어에서 떨어졌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고 유독 바지만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또 안경과 휴대폰, 출입증도 충격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시신 주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밖에도 고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피 묻은 시계줄만 발견되고 몸통은 이후 고인의 유품을 모아둔 사무실에서 발견되는 등 사건 초기 현장 사진은 현장 보존 자체가 미흡해 유족들로부터 조작 의혹을 받고 있다.

유족과 대책위는 이 같은 의혹들을 종합해볼 때 최 과장이 회사의 누군가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이미 타살 당했거나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강제로 추락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항공 측이 사건 직후 촬영한 현장. 30m 높이에서 떨어진 최 과장의 소지품들이 별 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채 가지런히 놓여있다. 유족들은 인위적 현장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최광진 과장 의문사 대책위


“16년간 성실하게 일한 댓가가 의문사인가”

유족들은 “대한항공 측은 진상규명은 외면하고 경황이 없는 만삭의 아내에게 장례를 종용하는 등 사건의 무마와 은폐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며 “16년을 성실하게 일한 댓가가 겨우 의혹투성이 의문사인가”라고 분노했다.

유족들은 또 “대책위가 꾸려지고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자 서울 본사와 부산에서 번갈아 가며 ‘보상받기 싫으냐’,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협박을 해왔다”며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관계자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김포공항에서 나흘간 추모제와 선전전을 갖고 다음 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현재 이 사건은 유족과 대책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난 10월 부산지검이 재조사를 결정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경찰의 초동수사가 미흡하다는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유족과 대책위는 앞서 지난 10월 1일 대한항공과 강서경찰서, 최초목격자, 경찰공의 등을 ‘사체유기와 직무유기등의 혐의’로 부산지검에 고발했었다.

대책위는 대한항공의 사건 은폐 의혹과 관련 CCTV, 관계자들 통화내역 등을 증거보전신청을 해놓고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대책위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김포공항 내에 설치된 다양한 각도의 CCTV를 판독하고 관계자들의 통화내역을 살펴보면 단순 자살이 아님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한항공 “협박.회유 사실무근, 불순한 의도 가진 사람들이 유족들 선동”

한편, 대한항공은 이날 대책위의 기자회견 현장에서 배포한 해명자료를 통해 “사측은 유족을 돕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유가족 측이 산재를 인정해달라는 요구 등 회사에서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항공은 또 타살 의혹에 대해선 “사인규명은 경찰에서 판단을 해야 할 부분이지 회사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협박.회유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대한항공은 나아가 “징계를 받고 대한항공에서 해고된 일부 사람들이 불순한 의도로 유족들을 선동해 회사가 유족을 돕고자 요청하는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며 민주노총 배후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족과 대책위는 대한항공의 이 같은 해명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 주장”이라며 “대한항공은 장례비용 지원 약속도 어겼을 뿐 아니라 유족을 협박한 녹취록을 갖고 있다”고 일축했다.

정성영씨는 “애초에 대한항공이 매형의 죽음에 성실한 자세만 보였어도 사인이 미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재벌의 눈에는 한 가장의 억울한 죽음마저도 돈 문제로밖에 안 보이는 건가”라고 개탄했다.

최 과장의 처남인 정성영씨(가운데)는 매형의 의문사를 밝혀내기 위해 104일째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김해공항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최병성 기자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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