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그룹이 '왕자의 난' 과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후 노무현 당선' 이래 최대의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그룹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말을 하고 있다. 뭐가 '이럴 리가 없다'는 건가.
현대차에 양날의 칼 들이댄 검찰
김재록 게이트를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는 29일 김재록 사건과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을 별도로 분리해 수사하겠다고 밝혀 그룹 관계자들을 긴장케 했다. 비자금 조성경위 및 사용내역을 깊숙이 들여보겠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차 비자금 전체나 분식회계 여부를 수사하지는 않을 계획이며 아직까지는 총수에 대해 출국금지도 하지 않았으며 추가압수 수색도 없을 것이라고 밝혀, 그나마 그룹 관계자들을 안도케 하기도 했다.
수사 중간브리핑을 맡고 있는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수사가 김재록씨 관련 로비 의혹을 중심으로 이뤄진 `원트랙(One-track)' 수사였다면 이제 현대차 비자금 조성까지 포함한 `투트랙' 수사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현대차그룹 전체 비자금을 추적하기에는 엄청난 인력과 장시간이 필요한 만큼 현대차 전체 비자금을 들여다보지는 않겠다"며 "이는 글로비스에만 국한시켜 보겠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현대차 입장에서 본다면, 검찰이 양날의 칼을 들이대는 양상이다.
'정몽구 현대차'의 2차례 위기
현대차 그룹 관계자들은 "정몽구 회장체제가 확립된 후, 2차례 큰 위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재록 게이트로 최악의 위기에 몰린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의선 사장. ⓒ연합뉴스
첫번째 위기는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 때였다. 하이닉스-현대건설 파산위기에 직면한 고 정몽헌 회장이 변별력을 읽은 상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이용, 정몽구 회장 몫인 우량기업 현대차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은 당연히 격노했고, 그후 정몽헌 회장측은 물론 정주영 명예회장과도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다. 정 명예회장 사후 5년이 지난 최근에 들어서야 정 명예회장 추모사업을 본격화하는 것도 당시의 서운함 때문이었다.
두번째 위기는 2002년 대선 때였다. 발단은 투표일 전날 정몽준씨의 기습적인 노무현 지지 철회였다. 이 때문에 여유있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앞지르던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이 거의 못될 뻔 했다.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가 당선되자, 현대차를 비롯한 현대가(家)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노무현 지지 철회의 이면에 현대가에 대한 이회창 후보의 엄청난 정치적 압력이 있었고, 이에 현대가가 굴복했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정-재계의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현대차는 새 정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시쳇말로 '온갖 공'을 들였다는 게 현대차 그룹 안팎의 전언이다.
현대차 관계자들이 "이럴 리가 없는데..."라고 망연자실해 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정부가 현대차를 타깃으로 삼을 리 만무한 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냐는 식이다.
김재록, 이주은 통해 정의선에게 접근?
그러나 바로 "이럴 리가..."라는 경악에 바로 이번 검찰 수사의 본질이 숨어있다. 즉 이번 검찰 수사는 정치권이나 재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음모론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 소식통은 "정몽구 회장은 이번 사건이 터지자 '도대체 김재록이 누구냐'고 호통을 쳤다"고 전했다. 김재록의 존재를 거의 몰랐었다는 전언이다. 이 소식통은 "김재록은 정 회장이 아니라 정의선 사장쪽으로 접근했으며, 그 중간다리 역학을 한 이가 바로 이번에 구속된 이주은 글로비스 사장"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는 검찰이 오랜 기간 김재록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는 과정에 현대차와 김씨의 거래가 포착됐고, 이에 기습적으로 현대차와 글로비스를 급습하기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재계 일각에서는 "검찰이 29일 현대차 비자금 전체가 아니라, 김재록과 직접 관련된 글로비스에 국한해 비자금 문제를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는 해석을 하고 있기도 하다. 현대차 비자금 전체로 조사를 확대할 경우 그 파장이 김재록 게이트 차원을 넘어서 통제불능의 상태로까지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을 검찰이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역대 대형사건들 가운데에는 당초 수사 목적과 범위를 벗어난 사건들이 적잖았다는 점에서 과연 이번 김재록 게이트가 향후 어떤 파괴력을 동반할지는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