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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챔피언' 랜토스 의원의 '고귀한 삶'

[김동석의 뉴욕통신] 고인이 된 랜토스 위원장을 추모하며

워싱턴 의회내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일본군위안부결의안 통과 등 인권을 위해서라면 발벗고 나서는 헌신성으로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탐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 지난 11일 유명을 달리했다.

192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랜토스 의원은 16살 소년시절에 히틀러 치하의 유태인 노동자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는 수용소를 탈출했으나 생포됐고, 학살당하기 직전에 다시 극적으로 탈출해 3년 동안 부다페스트의 사촌 아주머니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1947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워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건너온지 33년만인 1980년 캘리포니아 제12지역구에서 연방하원에 52세의 나이로 진출한 뒤 지난 28년 동안 워싱턴 DC에서 최고의 휴머니스트이며 세계 인권문제의 방패막 역할을 충실히 해 왔던 그는 지난 11일 지병인 식도암으로 80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랜토스는 똑같이 나치의 학살 수용소를 탈출하여 겨우 살아난 어릴적 짝꿍인 ‘아넷트 랜토스’와 결혼했다. 슬하에 딸만 둘이고 17명의 외손녀를 두고 있다. 1990년과 92년에 랜토스는 사위인 ‘딕 스??’을 뉴햄프셔 제2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당선시켰다. 올 2008년엔 랜토스의 딸인 ‘카트리나 스??’이 뉴햄프셔 상원의원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를 하는 대표적인 정치가족이다.

1980년 레이건의 열풍으로 전국의 선출직을 공화당이 휩쓸고 있을 때 랜토스는 민주당 후보로 당당하게 당선이 되었다. 의회에 진출해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법안은 홀로코스트 당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준 당시 스웨덴의 외교관이었던 ‘라울 월렌버그’에게 미국시민권을 수여하는 법안이었다. 그후 그는 의회 내에서 인권문제라면 온 힘을 다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의회내에 인권위원회(Congressional Human Rights Caucus)가 설립됐다. 인권위원회에서는 공산권력하의 인권문제만이 아니고 미국이 감싸주는 제3세계의 우익권력하의 인권문제에도 적극 나섰다. 중국에서 인권문제가 진전되지 않고서는 미국의 경제 최혜국 대우를 하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리비아의 무하마르 가다피 대통령 독재를 해결하려고 2004년에 리비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1960년 이래 리비아를 방문하는 최초의 미국 정치인이었다.

동유럽 공산국가의 자유를 위해서, 한반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들의 평화노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일했다. 일본 총리가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빗대어서 "나찌 전범의 무덤에 헌화하는 것과 같다. 일본총리는 신사를 참배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병인 식도암의 발병을 알기 전 까지 북한방문을 계획하기도 했다. 의회내 유일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그는 역사적인 책무에 충실했다. 그가 미국 의회내에서 인권문제의 챔피언이라는 것에 이견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망인 ‘아넷트 랜토스’는 인권문제에 있어서 그의 최고의 참모역할을 해 왔다.

필자는 2005년 3월 미국 유태인들의 가장 강력한 정치력 단체인 유태인공공정책위원회(에이팩, AIPAC) 컨퍼런스에서 그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유태인지도자들의 테이블에 있던 랜토스를 찾아서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이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한국인 남자친구를 갖고 있는 외손녀가 있다고 한국인 손주 사위를 맞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인사를 받았다. 한국인이 유태인들만의 잔치에 참가한 것을 100% 이해해 주었다.

그로부터 꼭 2년 후인 2007년 3월 같은 행사장에서 필자는 ‘일본군위안부결의안’에 대해 행사장 복도에서 꼭 3분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필자를 정확하게 기억해 주었고, 결의안에 대해 자신의 보좌관을 만나라고 다음 만남을 배려하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가 말한 보좌관은 다른 의원들처럼 사무실의 스텝이 아니었다. 그 보좌관이 자신의 부인임을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인권과 여성의 이슈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국제분쟁 요소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랜토스 부인인 ‘아넷트 랜토스’는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인권할머니”로 소문이 나 있어서, 그들 부부의 인권에 대한 헌신과 노력을 잘 알 수 있었다.

결국 위안부 피해자할머니가 친필로 쓴 편지를 랜토스에게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고, 랜토스는 자기의 지역구에서 한인들을 만나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2007년 6월 16일 LA한인타운에서 랜토스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하원외교위원회가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6월26일 처리하겠다고 직접 발표를 했다. 일본의 막강하고 집요한 결의안 저지 로비도 랜토스의 인권문제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랜토스위원장은 외교위원회에서 '롤콜방식'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하원의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직접 미디어 앞에서 입장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인권문제에 대한 그의 결연한 의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6월26일 결의안의 외교위원회 통과는 하원결의안으로서의 90% 목표달성이었다. 랜토스 위원장이 결의안의 처리를 위해서는 미국을 방문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압력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을 통해서 전해오는 것을 얼마나 힘들게 막아냈는지, 동시에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 일본계 출신의 상원의 최고 거물인 이노우에 하와이주 상원의원에 대항해서 얼마나 힘겹게 싸웠는지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이러한 공로를 알게 된 한국정부의 이명박 당선인은 랜토스 위원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정말로 다행한 일은 그가 사망 직전에 한국정부의 이러한 결정을 보좌관으로부터 보고받고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운명 직전에 놓였던 랜토스 의원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대통령 당선인이 마치 필자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준 것 보다 더 기분이 좋아진다.

인권과 평화 문제라면 누구보다도 목소리를 높였던 랜토스 의원이 서거한 것은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 진정 애통한 일이며, 특히 미국으로서는 정말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랜토스 의원은 워싱턴 정치무대에서의 예의도 모르고, 하원의 법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필자를 기꺼이 만나 주었다. 일본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을 직접 언급했으며, 결의안을 미루고 통과를 말리는 당의 지도부에 꿋꿋하게 대항했다.

랜토스 의원은 인권문제를 워싱턴 정치권에 제기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용기를 진정으로 높게 평가했다. 워싱턴 정치권에서 가진 그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지만 필자는 그를 어렵지 않게 만났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권문제에 대한 의지와 소박한 성품 때문이었다. 랜토스 의원은 2007년 한인유권자센터 연례행사를 기념해 “초청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축하말씀을 전합니다. 한인들의 풀뿌리운동이 미국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유권자센타 발전을 기원합니다” 란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시 행사를 주최했던 한인들은 그분이 우리의 노력을 기억하며 이렇게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기도 했다.

필자가 에이팩 행사장에서 그를 만났을 때에 뉴햄프셔주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하는 자기의 딸을 소개해 주었다. 자기의 딸이 앞으로 자기를 대신해서 미국의 정치가 인권문제에 민감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랜토스 의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은 그의 딸의 선거운동을 돕는 일인 듯하다. 필자는 지난 14일 거행된 그의 장례식 이후 고귀한 인권의 가치를 위해 헌신해온 랜토스 의원에게 최소한의 의리라도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진심으로 고 탐 랜토스 하원외교위원장의 명복을 빈다.

랜토스 의원은 인권문제를 워싱턴 정치권에 제기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용기를 진정으로 높게 평가하며, 일본을 포함한 각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미 하원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김홍국 기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미국 정가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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