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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암장군' JP모건을 아시나요?

[170년 비밀의 역사를 찾아서(상)] 월가의 진정한 지배자

최근 금융공황으로 월가의 내로라 하는 모든 금융기관이 휘청거릴 때, 단 한곳은 예외였다. JP모건이다. JP모건은 나홀로 폭풍권 밖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위기때마다 막후에서 조용히 구원투수의 모습을 보였다.

지난 3월 베이스턴스가 쓰러져 월가가 패닉상태에 빠지자, 즉각 베어스턴스를 인수해 시장을 진정시켰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AIG마저 휘청대자 미정부는 즉각 JP모건에게 AIG 인수를 간청했으나 "이번 위기는 그렇게 수습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미정부에게 즉각 AIG를 국영화할 것을 조언했다. 미정부는 JP모건의 조언에 따랐다.

JP모건은 또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한 직후인 15~16일 1천380억달러의 막대한 자금을 리먼 브로커-딜러 부문에 지원하기도 했다.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뉴욕연방은행의 SOS에 따른 것이었다. JP모건은 군소리없이 지원했고 다음날 뉴욕연방은행은 이 돈을 갚아 리먼 파산에도 브로커-딜러 부문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만큼 월가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JP모건은 또 미국정부와 의회에 월가 붕괴를 막기 위해선 아무리 천문학적 돈이 들어가더라도 부실자산매입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이를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JP모건이야말로 물밑에서 월가 붕괴를 막기 위해 암약한 월가의 구세주이자 '대부'였던 것이다.

JP모건, '월가의 암장군'

국제금융계에서는 흔히 “JP모건의 지난 170년사를 알면 미국 금융과 미국 경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월가에서는 JP모건을 '그루'라 부르고, 일본금융계에선 막후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실세라는 의미에서 '암장군(暗將軍)'이라 부른다.

JP모건의 지난 170년 역사를 보면 이같은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JP모건이야말로 과거 170년 동안 미국 금융계를 지배해온 최대 실력자이자, 금융 이외의 철도·철강·통신·영화 등 실물경제계에서도 패권적 지위를 행사해온 막후실세였기 때문이다. JP모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막후에서 역대 백악관의 주인을 위시해 BIS(세계결제은행) 등 국제경제기구를 쥐락펴락 해온 ‘울트라 정치 파워’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JP모건의 170년 역사를 추적해 보자.

JP모건이라는 명칭은 창업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존 피어폰트 모건은 1837년 뉴욕 인근의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직계 선조인 마일스 모건은 200년 전인 1636년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베이 콜로니로 옮겨온 이주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이르러 모건 집안은 ‘애트나 생명’을 필두로 한 보험업과 부동산 투자, 고리대금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부친인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S. Morgan)은 모건이 미국 금융계의 대부로서 군림하는 데 필요한 고등교육과 실전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물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JP모건은 창업연도를 1838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유는 이 해에 아버지 스펜서 모건이 미국인 피바디가 미국의 주정부 채권을 런던 투자가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런던에 설립한 상업은행을 사들여 1854년에 아들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JP모건은 그 무렵 국제금융센터였던 런던에 본거지를 두고서, 미국의 최대 토목사업이던 대륙간 횡단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유럽시장에서 조달하는 채권 중개사업을 통해 은행의 부를 크게 늘릴 수 있었다.

JP모건 창업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 ⓒJP모건

미국 최초의 군산복합 재벌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 1856년 금융계에 진출한 모건은 얼마 뒤인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본능적으로 돈냄새를 맡았다. 이에 그는 그해에 즉각 아버지 곁을 떠나 뉴욕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투자은행 ‘JP모건상사(J.P. Morgan & Co.)'를 독자적으로 설립했다. 동시에 화약 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최대의 무기상 ’뒤퐁(Dupont)'과 손잡고 총기류와 군화 등을 취급하는 무기 중개업자로 나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었다.

뒤퐁은 그 뒤 JP모건과 함께 ‘제너럴 모터스’의 주식을 공유하는가 하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 모건과 손잡고 대량으로 무기를 공급하는 등 모건과 충실한 동반자 관계를 이어갔다.

모건은 당시 '악덕상인'으로 악명 높았다. 그는 남북전쟁 과정에서 격발사고가 잦은 불량 총기류와, 새로 배급받아 갈아 신고서 반나절도 행군하지 않아 밑창이 떨어지는 불량 군화 등을 비싼 값에 군납해 장관이 경질되는 등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회의 진상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밑천으로 1864년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은행까지 JP모건 상사에 합병시켜 오늘날과 같은 대형 투자은해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JP모건시대가 본격 개막한 것이다.

철도-통신산업 장악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전쟁특수’가 사라지자 모건이 눈을 돌린 곳은 철도-통신사업이었다. 40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대륙간 횡단철도가 개통된 1869년 이후 철도사업은 각종 파생적인 부가가치를 낳는 고수익 사업으로 급신장하는 중이었다. 특히 철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 통신망이었다. 아직 전화가 개발되기 전인 그 무렵 주된 통신망은 전신이었다.

그런데 서부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 전신소가 위치한 곳은 다름 아닌 전국의 철도망에 점점이 박혀 있는 철도 역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융인에게는 빠른 정보가 곧 돈을 의미했다. 때문에 은행이 철도업을 장악하면 자동적으로 전신망도 장악해 생생한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었고, 이같은 정보는 곧 돈으로 이어졌다.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 모건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공격방향을 잡은 모건은 곧바로 철도업에 뛰어들어 200여 개나 난립했던 철도회사 가운데 소규모 회사를 매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철도회사를 상대로 기업 인수합병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 이르러 모건의 철도재산은 30억 달러로 부풀었고, 그는 미국의 4대 철도업자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철도왕’이라 일컬어지던 미국 최대의 철도업자 윌리엄 밴더빌트와 힘을 합쳐 미국 굴지의 전신회사이던 ‘웨스트 유니언’사를 집어삼키는 데 성공했다. 철도사업에 뛰어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에디슨 활용해 부 팽창하고 철강산업 장악도

그런데 웨스턴 유니언사를 사들인 모건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들어왔다. 무명의 전신기사에 불과하던 토머스 에디슨이라는 젊은이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다. 에디슨은 훗날 ‘발명왕’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 인물이었다. 에디슨은 입사 후 자신의 발명품을 잇달아 회사에 쏟아내놓기 시작했다.

모건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였다. 에디슨의 높은 상품가치에 주목한 모건은 비밀리에 거금을 투자해 ‘에디슨 전등’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다음 JP모건사를 대주주 겸 주거래은행으로 만들어버렸다. 모건의 예상대로 얼마 뒤 에디슨은 세기적 발명품인 전등을 발명해냈고, 미리 대주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건은 엄청난 돈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모건은 또 벨이 발명하고 에디슨이 실용화시킨 전화사업에도 재빨리 손을 대 ‘제너럴 일렉트릭’을 설립하여 전화시장마저 삼켜버리는 등 평생 동안 1,000여 개의 발명품을 쏟아낸 에디슨을 철저하게 활용하여 부를 부풀려나갔다. 모건은 ‘세계 최초의 영악한 벤처 캐피털리스트’였던 셈이다.

모건의 확장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소유이던 ‘카네기제강’을 그때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던 5억 달러에 군말없이 사들인 다음 이를 다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페더럴제강·내셔널제강·아메리카제강 등과 합병시켜 ‘U.S. 스틸’이라는 미국 최대의 ‘철강공룡’을 만들어 순식간에 미국 철강업계를 장악했다.

미국 철강시장을 완전 독식하다시피 한 U.S. 스틸의 주가는 모건이 카네기제강을 매입했을 시점보다 몇 배나 폭등해 모건은 며칠 만에 매입가격의 배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모건은 기업 인수합병의 귀재이기도 했다.

공황때 혼자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사나이

모건이 팽창을 거듭하던 1907년, 미국에서 대규모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이해 들어 9개월 동안 자그마치 8,000여 개의 기업이 쓰러지고, 주가는 대폭락하였다. 이것은 그때부터 20여 년 뒤에 발생한 1929년 세계대공황과는 비교가 안될 ‘일국(一國)차원의 공황’이었다. 그러나 ‘천민 금융자본주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의 금융산업이 받은 충격은 붕괴 직전의 엄청난 것이었다.

그 무렵의 미국 금융산업은 전당포 수준이었다. ‘금융기관=은행’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금융의 1차산업’ 격인 은행이 여수신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기 이전 미국 전역에는 크고 작은 2만 5,000여 개의 은행이 난립하고 있었다. 또한 통화와 신용의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나 은행의 건전성을 상시적으로 감시 감독할 수 있는 금융감독 당국도 존재하지 않아 경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전에 경보를 울리거나 유동성을 조절할 수 없었다.

금융기법도 형편없어서 모든 대출이 담보대출이었지 신용대출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30년 만기 주택할부금융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보 없이 급전을 빌리려는 개인은 살인적인 고금리를 요구하는 전당포로 가야 했다. 또 오늘날과 같은 예금보호제도도 전혀 없었고 증권 등에 대한 건전성 규제도 없었다.

1907년 연초부터 위태롭던 뉴욕 금융시장은 마침내 10월에 들어 주가가 폭락하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주가 폭락의 여파로 머컨다일 내셔널 은행이 문을 닫는 것을 시작으로 도산하는 부실 은행이 속출하면서 모든 은행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고객 돈을 갖고 주식투자를 하던 투자신탁회사들이 무더기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최근의 월가 위기와 흡사한 최악의 위기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당연히 예금자들이 은행과 투신사 앞에 장사진을 치는 인출사태가 벌어졌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조차 돈이 떨어져 주식거래를 중단해야 할 궁지에 몰렸다. 돈 많은 갑부나 은행 소유자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우리만이라도 은행에서 돈을 빼지 말자”고 결의했으나, 회의가 끝난 뒤 한두 시간도 채 안되서 서로 앞다투어 돈을 빼내가는 극도의 혼란상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댔다.

상황이 이처럼 무정부 상태로 치닫자 ‘금융계 황제’로 군림하던 모건이 직접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평소 “나는 대중에게 아무런 빚도 진 게 없다”고 공언하고 다닐 만큼 철저한 ‘샤일록의 후예’였다. “은행은 철저한 상업적인 집단인 만큼 은행에게 공익성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런 그가 자발적으로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가만 있다가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모건 왕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내로라 하는 뉴욕 금융가들을 모아놓고 모건이 맨 처음 착수한 작업은 투신사와 영세은행의 구제였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투신사와 영세은행들로 하여금 담보를 내놓도록 하고, 그 대신 대형은행들에게는 투신사에 대한 대출을 지시했다. 동시에 정부에 압박을 가하여 국립은행과 국립은행의 거래은행에 대해 구제금융을 지원하도록 했다.

자금부족으로 영업중단 위기에 처한 뉴욕증권거래소에 대해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증권거래소의 딜러와 증권사들은 평소 연리6%의 조건으로 하루짜리 콜자금을 써왔으나, 금융 경색이 극심해지자 100% 금리로도 자금을 빌릴 수 없었다. 모건은 여러 은행에서 10% 금리 조건으로 긴급자금을 모아 제공함으로써 주식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를 막았다.

공무원들에게 줄 자금이 떨어진 뉴욕시도 모건에게 SOS를 긴급 타전했다. 미국 최대의 도시가 파산하면 금융시장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모건은 뉴욕시 당국으로 하여금 연리6%의 수익채권을 발행하게 하고, 이를 은행이 사들이게 했다. 이밖에 각각 이해관계가 다른 투신사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공동출자해 구제기금을 만들도록 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이처럼 모건이 정부를 대신해 한 달여 동안 불철주야로 금융계를 재조직해낸 결과, 11월 들어 파국 일보직전까지 갔던 금융위기가 비로소 진정되었다. 모건의 혼자 힘으로 ‘중앙은행’ 구실을 해낸 것이다. 이로써 금융계에서 차지하는 모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인가가 만천하에 입증되었으며, 모건의 위상은 더욱 반석 같아졌다.

1907년 금융공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금융위기 이후 “모건이 우리의 금융위기를 영원히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내은행들이 재무부 지시를 다라 채권을 발행하여 현금부족을 막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해 통과시켰고, 의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를 비롯해 12개 국가금융기관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은행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JP모건이 홀로 1907 공황을 수습하며, 오늘날 월가의 기초를 다진 것이다. <계속>
박태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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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11 개 있습니다.

  • 5 7
    111

    한반도 중동 남미등지에서 미국의 전쟁위협과 전쟁없다
    모처럼 전세계는 미국주도 미국개입에의한
    전쟁위협과 전쟁에서 벗어났다.
    큰 변화이다..

  • 18 12
    멍바기

    한국은 계속 거품으로 간다
    거품이 터지면 공자금으로 메꾸고.
    부시와 나는 연탄 자살 하진 않는다.

  • 12 15
    오자 ?

    '그루'는 '구르' 아닌가?
    출처는 잘 모르겟지만 ....

  • 28 47
    ㅛㅛ

    자니카슨의 농담이 생각나네
    부도났던 오하이오뱅크가 문을 다시 열었답니다.
    그런데 오하이오주가 문을 닫았답니다.
    미국정부가 그리 되는거 아녀? ㅋㅋㅋ.

  • 15 17
    뷰스앤뉴스 &#52573;오

    박태견 기자님 기사 정말 잘보고 있습니다.
    경제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박태견 기자님 칼럼과 기사 보면서 많이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정보'와 '식견'을 주는 기사와 칼럼 부탁드립니다.

  • 13 11
    신림동에서

    아주 유익하고 도움이 됩니다.
    나는 뷰스뉴스에 매우 선입견이 안좋은 독자이면서 꼭
    들어와 봅니다(저의 성향과 반대적인 기사만을 쓰시다보니..)....이건 무슨 심리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곳의 성격,편집방향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사 정말 유익합니다.
    평소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음편 기대가 됩니다.
    이러다 뷰스뉴스 후원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제 꿈과 목표가 나중 이나라의 큰 기업가가 되는겁니다.
    그 목표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불황에도 이기는 업체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편집인 감사합니다.
    사실 정치 종교적인 기사보다 훨씬 삶에 유익합니다.

  • 28 14
    왕 애독자

    공부 많이 됐습니다
    유익하고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이 기다려집니다.

  • 13 13
    111

    미국의 국부를 먹을려면.은행이 아니다.....
    진짜배기기업들은 철도 전기.통신 항망 전자.등
    공기업에 있다가 민영화로 사기업에 넘어간 기업들.
    매물로 나오지 않았다 기다려 나오게 되어 잇으니.

  • 21 12
    111

    9.11 터지자... 이라크 후세인 상대로
    가공스러울정도로 여론조작과왜곡을 통하여
    이라크 침략을 일으킴으로써 또다시
    위기를 벗어날듯했으나 원유와 원자재가격이
    폭등이 왔고 서브로 현재 사단이 나고 있다....

  • 20 18
    상하이 삐에로

    결국은 전쟁으로 해법을 찾는 나라구먼..
    미국 금융계의 막후가 성장한 그 뿌리 자체가 애시 당초에 전쟁이였구먼..
    에~혀.. 이제 조만한 또 전쟁으로 돌파구 찾겠구나.

  • 25 16
    asdf

    매우 유익하고 시의적절한 기사
    워렌 버핏에 비해 한국에서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한 투자의 대가 JP 모건.그를 현 시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은 투자자나 당국자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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