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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박춘석 선생님 같은 분 안나와 안타까워"

"내게 음악을 모두 가르쳐주신 특별한 분"

"박춘석 선생님은 늘 밤에 피아노로 작곡하셨는데 담배를 무척 많이 피우셨어요. 건반 여러 개가 담뱃불에 탔기에 '선생님 담배 좀 끊으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14일 별세한 작곡가 고(故) 박춘석씨의 빈소인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이미자는 고인을 추억하며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영정 앞에 국화꽃을 놓은 그는 두 번 절을 하고도 이생에서의 작별을 고하듯 몇 분간 고개를 숙였다.

이미자는 박씨와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 '타국에서'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콤비를 이뤄 무려 700곡을 발표했다.

이미자가 기억하는 박씨와의 첫 만남은 1964년 '동백아가씨'가 히트한 뒤인 1965년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진도 아리랑'을 불렀을 때다. 이후 오아시스레코드 전속 작곡가이던 박씨는 지구레코드 전속이던 이미자와 작업하고자 지구레코드로 옮겼다는 게 이미자의 설명이다.

"오아시스레코드의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계셨는데, 선생님은 저를 무척 좋아해 파격적으로 지구레코드로 옮기셨어요. 가수로서 당신의 곡을 잘 소화해줬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패티김의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 등 번안가요를 최초로 만들기도 했던 박씨는 이미자를 만나면서 전통 가요 작곡가로 자리매김됐다.

이미자는 "선생님은 내게 음악적인 내용을 모두 가르쳐주신 특별한 분"이라며 "음악의 질과 무대 매너까지 모든 게 고급화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다. 노래를 천박하게 부르지 않도록 '이런 꺾음은 하지마라' 등의 조언을 해준 덕택에 우리 전통 가요를 고급스럽게 부를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박씨와의 녹음 당시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연습을 안 해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는 그는 "그때는 너무 바빴는데 지구레코드 20여 명의 작곡가에게 많은 곡을 받아 질보다 양이 먼저였다"며 "부산 공연 후 야간열차 침대칸을 타고 서울역에 내려 바로 녹음실로 끌려가 영화 주제가였던 '흑산도 아가씨'를 급하게 녹음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미자는 박씨와는 가수와 작곡가의 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라고도 말했다.

"제 아들이 5-6살 때, 레코드 취입을 위해 스튜디오에 가면 저는 녹음하고 박 선생님은 무릎팍에 제 아들을 앉혀 놓곤 했어요. 제 아들에게 선생님은 삼촌이자 큰 아버지셨고 우리는 가족이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자와 박씨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12년 전이다.

이미자는 "선생님이 성격이 깔끔해서 투병 이후 우리를 피하셨다"며 "투병 1-2년 동안에는 내 아들이 찾아가면 손수 배웅도 하셨는데, 이후 찾아가려 하면 오지 못하도록 했다. 12년 만에 비보를 접하니 너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으로 뵌 모습은 자택에서 휠체어를 타고 계실 때"라며 "마침 TV에서 선생님의 노래가 나오기에 내가 '선생님 열심히 운동해서 다시 작업하자'고 말하자 언어 장애가 오신 탓에 '그래, 그래'라고만 말씀하시더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50주년 기념 공연에서 박씨의 노래를 모아서 부르기도 한 이미자는 "선생님은 공연 때마다 나에게 맞는 곡의 레퍼토리를 택해주셨다"며 "내 노래 중 금지곡들이 해금된 후 30주년 공연 때 기념곡 '노래는 나의 인생'을 만들어주셨고 공연 지휘도 해주셨다"고 말했다.

그는 "안타까운 건 앞으로 이런 분이 안 나온다는 것"이라며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 선생님 곡들이 많은데, 앞으로 우리 세대에서 이렇게 좋고 아름다운 곡이 안 나올 것이라는 서글픔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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