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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내부고발자'의 쓸쓸한 뒷모습

사학비리 양심선언으로 '해직' 당한 김중년씨 이야기

주말인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김중년씨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파주에 있는 한 금식기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심신이 지쳤다고 했다. 더 이상 세상풍파에 시달리는 것이 끔직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내 내뱉는 한숨...

지난 26년 동안 경북 영덕여고(학교법인 조양학원)에서 행정실 직원(6급)으로 근무해 온 김중년(51), 그는 그렇게 조금이라도 세상 꼴을 안보기 위해 기도원으로 피신하다시피 했다.

2004년 12월 1일, 그는 경북 영덕여고 박 모 이사장(구속 후 집행유예 석방)이 지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4년여에 걸쳐 재단 돈 1억1천7백여만원을 횡령한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박 전 이사장(1989년 2월~2004년 3월 영덕여교 교장 재직, 2004년 3월~2005년 2월 조양학원 이사장)은 이 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1심 재판부는 김중년씨의 제보를 사실로 인정, 박 전 이사장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감독관청인 경북교육청은 조양학원의 기존 이사진을 전원 해임시키고 2005년 2월 25일자로 관선이사진(이사7인, 감사2인)을 파견했다.

사학의 비리를 폭로한 박중년 씨. 그는 이 일로 학교측으로부터 보복성 해직을 당해야했다. ⓒ뷰스앤뉴스


이사장 집 형광등 하나까지 학교 돈으로 사

복사기가 없던 80년대, 김씨는 학생들의 시험 문제지를 등사하는 일을 하는 서무실(현 행정실) 서무보조로 영덕여고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의 나이 25살 되던 1979년 2월의 일이다. 김씨에겐 첫 직장이었다.

김 씨가 영덕여고 서무실에 근무한 지 10여년만인 지난 1989년, 박 전 이사장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후에 안 얘기지만 박 전 이사장의 교장 부임은, 그가 ▲영덕여고와 ▲영덕여중 두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학교법인 조양학원을 실질적으로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김중년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박 전 이사장이 맨 처음 한 일은 서무실 직원들을 상대로 사직서를 제출받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박 교장(박 전 이사장)은 "내 말을 안들으면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고 직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그때부터 서무실 서기로 승진해 학교 지출관련 회계업무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금전출납 일을 맡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학교가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고생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박 교장은 공사 및 물품 구입 계획, 납품, 지출 등 학교 행정실이 해야할 주요 업무를 자신이 직접 지시하고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적인 쌈짓돈을 만들기 위한 노림수였다. 예를 들어 학교 관련 공사시, 이에 사용되는 공사 물품 단가를 조작하거나 수량을 부풀려 지출하는 방식이다. 박 교장은 뒤에 대금업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그 차액을 되돌려 받는 수법으로 학교 돈을 횡령했다. 물론 학교 회계 장부에는 정상적으로 지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박 교장은 김중년 씨에게 ‘얼마만큼의 물품을 어떻게 회계처리하라’고 손수 지시했다. 김씨는 이같은 비위사실이 담긴 학교장의 친필 메모지를 간간히 확보해 두었고, 훗날 이 메모지들이 증거물이 되어 박 교장의 주요 비위 혐의를 입증해 내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심지어 박 교장은 자신의 집에 쓸 형광등 하나까지 학교 돈으로 구입했다. 이같은 사실 또한 김씨에게 지시내린 박 교장의 친필 메모에 드러나 있다.

15년의 침묵... 그리고 어느 날의 '고해성사'

김중년 씨는 이같은 박 전 이사장의 크고 작은 비위사실이 그가 조양학원을 인수해 영덕여고 교장으로 부임한 지난 1989년 이후부터, 자신의 양심선언으로 박 전 이사장이 조양학원 이사장 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지난 2004년 말까지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이쯤에서 드는 자연스러운 의문점은 “그가 왜 무려 15년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사장의 비리를 폭로했냐”는 것이다. 그동안 그를 취재했던 기자들의 한결같은 물음이기도 했다.

처음 박 전 이사장과 일하던 10여년동안(1989~1999)은 김씨도 이같은 박 전 이사장의 비위사실을 애써 눈감으려고 했다. 주위 지인들에게 박 전 이사장의 비위 사실에 대해 고민을 털어놔도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원래 사학이 그래”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양심의 가책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비리를 함께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해도, 내가 눈감는 것은 비리를 방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흔들리던 김씨는 용기를 내 2002년 무렵부터 박 전 이사장의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전 이사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의 문제제기를 일축했다. 참다못한 그는 결국 2004년 6월께 박 전 이사장의 비위사실을 정리한 내역서를 영덕여고 선생님들에게 폭로했다.

그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제일 처음 이같은 비위 사실을 알린 것은 교사라는 직업의 '양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떡하든 학교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차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학에서 교사라는 직책은 회사 내의 일개 직원과 같은 신분이다. 아무리 그의 문제제기가 타당하다 한들, 이사장이 나가라고 하면 하루아침에 밥벌이 수단을 잃는 것이 우리 사학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그의 ‘양심선언’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고민하던 그는 급기야 2004년 11월 말,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에 박 전 이사장의 비위 사실을 담은 내용을 제보하고 도움을 요청해 같은 해 12월 1일 국회 기자실에 섰다.

선천적으로 말더듬는 김씨 “평생 억눌린 가슴을 안고 살다”

하지만 그가 양심선언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15년을 끌어온 진짜 속내는 다른 것에 있다. 그는 어릴 때 경풍을 앓고 가벼운 뇌손상으로 말더듬이가 됐다. 눈을 자주 깜박이고 말을 자주 더듬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유년시절, 중년 씨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이유도 그의 말더듬는 장애 아닌 장애 탓이다.

말더듬는다고 제대로 된 항변 한번 못해보고 살아온 김중년 씨. 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그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가 버렸다. 늘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만 살아야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짐작치 못한다.

그가 지난 15년의 세월동안 침묵을 지켰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혹시나 이사장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말더듬는 놈이 헛소리한다”고 비웃음을 살까, 그는 무엇보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가 박 전 이사장의 지시가 담긴 친필 메모를 차곡차곡 보존해 둔 것도 바로 이같은 말못할 속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양심선언’을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위 ‘내부고발자’로 세상에 맞선다는 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중년 씨의 내부고발로 박 전 이사장은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그는 26년간 일하던 영덕여고에서 쫓겨났다.

박 전 이사장 퇴출 이후, 도교육청은 영덕여고에 관선이사진 9인을 구성해 파견했지만, 여전히 박 전 이사장의 아들은 이 학교 교감자리를 유지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관선이사에 선임된 9명의 이사진이 한결같이 영덕지역 인사들이라는 사실이다. 박 전 이사장과 평소 친분이 있던 인사들도 대거 이사진에 포진했다.

심지어 이사회에 징계요구를 신청할 수 있는 R 현 영덕여중.고 교장까지도 이사진에 포함됐다. R 교장은 박 전 이사장 시절, 박 전 이사장이 친히 영덕여중 교장으로 발령한 그야말로 조양학원 인사인 셈이다.

이같은 기형적 관선이사 구성과 박 전 이사장의 아들이 그대로 영덕여고 교감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놓고 그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판단, 박 전 이사장의 아들 박 모 교감의 사퇴를 촉구하며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이번에는 경북도육청 홈페이지를 비롯한 23개 시.군 교육청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는 이 일로 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결국 2005년 11월 3일자로 해임됐다.

그를 해임한 관선이사진은 “김씨가 이미 처벌을 받은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다시한번 폭로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임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김중년 씨는 이러한 조치가 박 전 이사장의 비리 사실을 폭로한 보복성 인사라며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진정을 냈다. 지노위는 이에 “(김 씨의 재차 폭로가) 다소 감정적인 면이 있으나 보편적 표현의 자유를 벗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고 재심시 근로자가 반성한 사실이 있으므로... 해고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라며 '부당해고 판정'을 내려 원직복귀를 명했다.

하지만 학교측은 지노위의 판정에 불복,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했고 중년 씨는 아직도 복직을 못하고 있다. 학교측은 더 나아가 중노위 판정에서도 부당해직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법정소송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가겠다는 입장이다.

양심 선언을 하고도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뿐이었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 지쳐버린 중년 씨는 잠시라도 세상을 등지기 위해 기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뷰스앤뉴스


“그의 양심 선언이 그를 다시 ‘왕따’로 만들다”

논란의 정점에는 역시 관선이사진 구성이 자리하고 있다. 경북도교육청이 학교측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을 관선이사로 구성한 그 결정부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박경양 사립학교개혁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교육청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퇴임 후 달려가는 곳은 십중팔구 사학”이라며 “현재 사학관련 단체나 학교관련 단체의 주요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교육계 인사들이 주류”라며 교육청과 사학간의 공생관계를 지적했다.

길고 긴 중년 씨의 외로운 싸움. 이제 그를 지지하던 주위 사람들도 하나 둘 그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경북 포항의 모 고등학교 행정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의 동생마저도 “뭐 할라꼬 내부 고발인지, 지랄 인지를 했노? 형이 뭐 영웅이가”라며 원망아닌 원망을 했다 한다.

사학비리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서울 금천구 동일여고 3명의 교사 사건처럼, 김씨의 양심선언도 결국 세상의 모진 풍파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당연한 문제제기조차 못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폐쇄적 문화, 그리고 대한민국 일부 사학의 거침없는 비리 행진에 동일여고 교사들과 중년 씨 같은 우리사회의 ‘옥석’들은 되레 죄인이 돼가고 있다.

평생 말더듬이로 억눌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중년 씨는, 이 일로 세상에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기도원으로 떠난 그가 하루 속히 마음을 다잡고 세상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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