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바로잡습니다] 부지영 전 <조선일보> 특파원 반박문

"2006년의 '조평사태와 나' 기사, 사실과 달라"

이 링크 주소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OB&sch_key=&sch_word=&seq=877 에 2006.3.30일부터 2009.5.9일 현재까지 약3년 2개월간 게재중이던 '이연홍의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 <2> 조평사태와 나 기사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며 사건 당사자인 부지영 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으로부터 당시의 검찰 수사 기록에 의거한 수정및 명예훼손기사 게재 중지요청이 왔기에, 해당 기사를 폐쇄하며, 부지영 기자의 요청대로 '바로잡습니다' 기사를 본건 관련 기사의 게재기간만큼 게재합니다.

원본 기사의 필자인 이연홍씨는 12일 오후 자신의 기억에 의한 기사내용이 사실과 다름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기사를 포함한 일체의 조평사태 관련 기사의 수정과 편집에 대한 최종권한을 부지영기자에게 위임하였으며, 3년2개월이라는 동일 기간의 게재에 동의했음을 관련포탈사이트와 독자님들께 알립니다. 본지도 이번 사태로 본의 아니게 부지영기자와 관계자에게 피해가 돌아간 데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부 주>


<바로 잡습니다-원본 기사 순서대로>

1. (그러나 조선일보 부지영 기자는 달랐다. 그는 기사화하겠다고 마음 먹었던거다. 부기자가 기사를 보낸줄 모르고 있었다 > 운운 ....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순방 기사중 제일 먼저 기자들의 이야기를 기사화 한 곳은 당시 중앙경제신문(추후 중앙일보에 흡수)의 모 기자였으며, 현지에서 송고했습니다. 그러나 주간조선 기사는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 자체를 여행이 끝나고 귀국인사차 회사로 들렀을때 주간조선 편집부로부터 받았고, 따라서 주간조선 기사도 이미 보도된 중앙경제의 기사내용과 다른 취재, 기자단의 풀내용등을 모두 합하여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기사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기사를 보내기로 마음 먹은 적도 없습니다. 기사가 보도된 것도 1주일전에 기사를 마감하는 주간조선의 특성상 늦어진 것일뿐으로 이와 관련된 이기자의 기사내용은 모두 이 기자의 기억 착각이며 사실과 다릅니다.

2. ("조선일보 기사는 썼는데 넌 왜 안썼냐 " 약속위반이다 운운.)

마치 부지영 기자가 엠바고를 어긴듯이 표현되어 있는데, 엠바고는 처음 깨지면 다른 사들이 앞다투어 쓰기 때문에 사실상 엠바고를 깬것은 지금은 중앙일보로 합쳐진 당시 중앙경제였습니다. 또 '여행 뒷이야기'라는 주간지의 제목처럼 당시 기사는 바로 뒷이야기를 쓰는 것이기였기에 엠바고 걸린 것도 걸릴 것도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3면에 부기자의 기사는 모두 사실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기고한 '순방 수행기자중 한사람'은 바로 현지에서 기사를 제일 먼저 송고한 중앙경제의 기자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 이후 검찰 조사과정에서 다 밝혀져서 관계자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기자가 왜 이제와서 중앙경제 기자는 익명처리하고 모든 것을 본인의 것으로 기술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읍니다. 아무튼 사실과는 전혀 다른 허위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3. (...유럽여행중엔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때문에 본것도 들은 것도 많지 않았다) 운운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허위이며 명백한 명예훼손입니다. 조선 동아 중앙등 중앙지는 1차 기자단 풀 대상이므로 주요 행사에 일차적으로 풀 취재를 갑니다. 그 풀취재를 빠진 것이 없고, 풀 기자는 풀에 갔다 오면 그 현장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른 기자들에게 원고나 혹은 구두로 풀(내용의 공유)을 합니다. 검찰조사에서 밝혀진대로 당시 기자단의 풀취재 관행상 본인이 현장에 없었던 기사 내용이 몇행분량 있었으나 그것은 본인이 풀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빠진 것이었을 뿐이며,(가고 싶어도 풀인원이 많으면 갈수 없음) 이것은 다른 기자단 전원 같은 입장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교황님에게 '헤이'라는 현장에도 본인은 어김없이 있었으며, 교황님과 직접 제가 악수하는 사진을 원본과 카피본등으로 지금까지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 좌우옆에는 이연홍기자와 당시 동행한 동아일보 기자, YTN기자가 같이 찍혀 있습니다.

이 사진이야말로 당시 현장 취재시 자리 배치나 풀관행을 여실히 말해주는 산 증거입니다.

교황 고 요한 바오로 2세와 악수하는 모습. ⓒ부지영


기자단과 의원들의 일정중 개인행동이라 할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식일정이 끝난후 기자단과 의원들이 단체로 관광여행을 갔는데 본인은 데스크와 약속한 유럽의 정치와 미디어와 관련하여 미리 한국에서부터 어레인지 되어 있던 외국 기자들(미 국무성 초청 young journalist 그룹 지인들)과의 취재차 다른 사람들이 버스로 관광여행간 시간을 이용해 현지에 남아 취재를 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관광중 개별적인 취재를 했다고 해서 '여행중에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르며 허위입니다. 개별취재는 기자단의 공식일정과 관계없는 소위 '독단 취재'이기때문에 더더욱 누구에게 알릴 것은 아닙니다. 다만 관광여행을 캔슬하고 개인취재를 한다는 입장은 취재일정상 협의가 필요하므로 당측과 기자단에 사전양해를 얻고 진행했습니다. 이기자가 기사에 쓴대로 호텔방에서 더한 개인행동을 한 기자들과 의원들도 있었고, 이기자의 기사처럼 여행중에 풀 취재 이외의 시간 활용은 어느 누구도 문제시 한 적이 없습니다.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고 현지 취재원이 없는 기자들이나 의원들은 주로 호텔 안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오락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호텔 주변이나 맴돌았다는 차이가 있다면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기사는 마치 본인 혼자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것처럼 사실과 달리 묘사하여 명백히 명예훼손을 하고 있습니다.

4. (평민당 의원은 71명..전원 1억씩..71억원)

말도 안되는 숫자입니다. 뭔가 이기자의 착각이거나 계산 착오로 보입니다. 이 기자는 당시 소송자료조차 보지 못했거나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당시 기사와 검찰 수사 기록에 명기되어 있지만, 소송을 낸 의원들은 기사에서 '자질과 품격없는 의원들'로 묘사된 당사자 의원들과 법무 출신이거나 법사위 소속등 법률관련 의원들이었습니다. 언론사상 최대액수의 소송이었던 것은 맞지만 소송액이나 소송을 건 사람의 인원 숫자조차 맞지 않고 계산의 근거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기사 내용 중심으로 계산하여 총액 87억2천만원의 손해 배상을 요구한 초대형소송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소송이었는데 정말로 평민당이나 혹은 이기자가 오보한대로 흠이 있었다면 조선일보와 저 개인이 패소하여 손해배상을 해야 했을 것인데, 소송은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반대로 불리해진 평민당 측이 취하하였고, 저는 그 소송후 약1년간 경제부에 잠깐 있다가 이듬해 동경특파원으로 부임하였습니다.

5,(왜 그걸 썼냐? 너는 현장에 없었잖아....그러니 다른 기자들도 니 편을 안들지" 운운)

1-4항의 사실을 기초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기자들이 편을 들지 않은 것은 이연홍 기자 자신이 다른 기사에서 밝힌 것처럼 당시 평민당의 압력때문이었습니다. 별도로 기자단이 모여서 회식까지하고 부지영기자와 이연홍 기자의 편을 들지 말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당시 기사와 검찰 조사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이곳에서의 논의는 생략)

6. (박태준 포철회장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운운)

촌지 내용은 전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술값도 이기자가 낸 기억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부탁을 하고 당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진실대로 진술해달라고 협조요청하는 조선일보와 저의 입장상 제가 대부분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후원을 하는 제3자들이 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7. (며칠뒤였다. ..소송에서 이길수 없어...내 증언때문이었다.)

이 시점도 이기자의 기억 착각으로 보입니다. 평민당이 소송을 취하한 것 혹은 소송취하방침이 흘러나온 것은 며칠뒤가 아닌 약 6개월 정도가 흐른 다음이며 참고인조사와 각종 사실(조선일보 내부의 자체 조사를 포함)로 인해 시간이 흐를 수록 평민당이 불리해지자 슬그머니 법적으로 소송취하를 한 것이며, 이 기자의 기사처럼 이 기자 검찰 진술후 며칠후는 아닙니다. 당시 증거는 관련 기사들과 검찰제출 자료에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평민당이 그해 10월 17일 무조건적인 소취하를 함에 따라 조선일보도 소를 취하했음을 보도한 89년 11월 10일자 1면 조선일보 .ⓒ조선일보


다만 시점과 여러 기사가 적시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나 검찰 조사에서 이연홍기자가 유일하게 진실의 편에 서서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던 용기있던 기자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로 그후 평민당의 공적으로 몰려 집중포화를 맞은 것은 사실이며, 이 모든 의원-기자단간 마찰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국회의원들의 가방 들어주기'를 하지 않았던 기자들편에 섰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 기사에는 게재하지 않았으나 당시 평민당 의원들은 김대중총재를 따라가서 필름이나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자신의 가방조차 공항에 그냥 놓고 가면서 기자들에게 들어줄것을 요청하는등 여러 후안무치한 행동을 할 정도로 수준이 낮아 일부 기자들이" 우리를 가방 모찌(들어주는 사람 비서역의 일본식 용어)로 아느냐"고 짐을 들지 않고 반발한 것에서부터 의원-기자단간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서경원 사건에서도 조선일보가 이연홍기자를 받아들인 또다른 이유는 바로 서경원 사건 자체가 조선일보-평민당 사태 사건 조사중에 터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경원 의원이 바로 비행기내 양말 사건의 주인공인데 검찰에서 출두 요청을 내도 응하지 않고,소환된 평민당 의원들과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수사중에 서경원의원이 북한에 다녀왔다는 정보가 수사기관에 입수되어 그 사건의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누가 평민당내에서 같은 서경원의원을 밀고했는지는 본인으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부지영 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배
부지영 전 <조선일보> 동경특파원

댓글이 0 개 있습니다.

↑ 맨위로가기